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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차를 마시며] <6>호국 불교 맥 잇는 흥국사 주지 명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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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2-12 19:52:10 수정 : 2009-02-12 19: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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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자신에게 유익"
◇명선 스님이 햇살이 내리쬐는 흥국사 정묵당 툇마루에 앉아 대웅전을 가리키며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1690년 송광사 대웅전 설계도면을 가지고 와 그대로 중창했다는 흥국사 대웅전은 송광사 대웅전이 6·25전쟁통에 소실되면서 더욱 역사적 가치를 지니게 됐다.
“전남 여수시와 광양시를 잇는 광양대교와 돌산 제2 대교, 여수∼순천 자동차 전용 도로가 한창 건설 중입니다. 고속철도(KTX)도 익산을 거쳐 여수까지 들어올 예정이고, 특히 엑스포가 열리는 2012년이면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처럼 생긴 중앙 교각 거리가 1545m인 광양대교(일명 1545브리지)가 완공돼 여수의 새 명물로 등장할 것입니다. 엑스포가 지역 경제 발전을 20∼30년은 앞당기고 있습니다.”

여천 간이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갈아타고 여수시 장흥동 흥국사(興國寺)를 찾아가는데, 택시기사가 신바람 나게 여수의 청사진을 펼쳐 놓는다. 택시가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산길로 접어들자 고색창연한 사찰 전각들이 웅자를 드러낸다. 구례 화엄사 말사인 흥국사는 ‘전국 3대 진달래 군락지’ 영취산(439m) 자락에 앉아 겨울잠에 취해 있었다.

시운(市運)을 예측이라도 한 것일까. 24년 전 전각마다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는 쇠락한 흥국사를 맡아 ‘호국의 대가람’으로 변모시켜 놓은 주인공이 바로 조계종 대종사 명선(73) 스님이다.

흥국사를 찾던 날, 노스님 한 분이 털모자를 쓰고, 대웅전 앞 적묵당(寂默堂) 툇마루에 앉아 겨울 볕을 쬐고 있다. 대웅전에서 3배를 하고 나오니, 노스님은 오간 데 없고, 찬 바람만 휑하니 뺨에 스친다. 잠시 경내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대웅전 뒤 요사채 ‘해동선관(海東仙觀)’에서 조금 전의 노스님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명선 스님과 첫 만남은 이렇게 옷깃을 스친 듯 이뤄졌다.

인사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 옹색한 주지실을 둘러보니 오른쪽 벽에 누더기 법복을 한 스님 한 분이 지팡이 대신 곡괭이를 들고 앉아 있는 대형 진영(眞影) 한 점이 모셔져 있다. 스님 옆에는 호랑이가 앉아 있다. 왼쪽 벽에는 경허, 동산, 성철 스님 등 근현대 기라성 같은 대선사들 사진이 걸려 있다. 진영 속 스님은 망국의 한을 품고 국경을 넘는 동포들에게 간도 땅에서 보살행을 행한 수월 선사였다. 명선 스님은 수월 스님의 증손상좌다.

“여수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관할하던 전라좌수영의 의승수군(義僧水軍) 본부였지요. 당시 자운과 옥현 두 선사가 창설한 의승수군은 전라·경상·충청 3도에서 승려 700명가량이 집결해 있으면서 멀리 서해안까지 파견나가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일반 장수들은 전쟁 중 더러 달아나기도 했지만, 의승들은 도망가기는커녕 바닷가에 토굴을 지어놓고 그 안에 살면서 낮에는 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왜적을 막아내는 그야말로 붓다의 가르침대로 ‘동사섭(同事攝)’을 실천했지요.”

명선 스님은 흥국사 내력을 꿰고 있었다.

1985년, 50세 나이 때 찾아든 흥국사는 폐사 직전의 영락(零落) 그 자체였다. 장마철만 되면 대웅전 등 대부분의 전각들이 비가 새 양동이를 받쳐 놓아야 했다. 명선 스님은 부임 이후 대웅전을 해체 보수하는 등 12개 전각을 모두 보수해 말끔하게 단장했다. 대웅전 해체 때 300명의 의승수군 명단이 발견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들 승병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1905년 이전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 활동은 크게 부각된 데 반해, 좌수영 의승수군의 공은 감춰져 있지요. 일본 해군성 자료에는 거북선 설계자가 자운과 옥현 두 선사로 기록돼 있지만, 이 역시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제대로 밝혀내야 할 겁니다.”

흥국사는 날로 달라졌다. 선불장, 만월당, 조월암 등 13채의 부속 건물을 새로 지어 모두 25채의 전각을 갖추고, 무게 2100관의 범종도 제작해 대가람의 위용을 드러냈다. 명선 스님은 문화 유산 보존에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사실 흥국사는 대웅전, 영산회상도, 홍교 등 보물이 6점이나 되는 문화재 보물창고였다. 스님은 유물을 정리해 범종 등 3점을 보물로 추가 등재케 했고, 영취산 중턱 7곳에 물탱크를 설치해 화재 방지에도 만전을 기했다. 또 박물관(의승수군유물전시관)을 지어 유물 800점을 전시·보관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편액 ‘공북루(拱北樓)’와 수군들의 유물이 잘 보존돼 있다. 박물관에는 아직도 보물로 등재할 유물이 여러 점 있다.

명선 스님이 전하는 ‘공북루’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 이순신이 좌수영을 통치하고 있는데, 밤중으로 농어민들이 하나 둘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이 자운·옥현 선사를 찾았다. 두 선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백성을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충고하고, 몇 가지 고칠 것을 주문했다. 그중 한 가지는 조회 때 앉아서 절을 받지 말고, 장군도 부하들과 함께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라는 것이었다. 또 낮에는 장수들에게 농사일을 돕도록 하라고 일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빠져나갔던 주민들이 모두 돌아왔다. 이순신이 두 선사의 고언을 받아들여 ‘모두가 함께하자’는 뜻으로 성문 위에 내건 글이 바로 ‘공북루’였다.

“임란이 끝나자 선조 임금이 흥국사에 백미 600석을 보내와 수군들의 고혼을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게 했지요. 여수 엑스포 때 불교예술의 진수가 담긴 수륙재를 재현할 계획입니다.”

명선 스님은 증조 할아버지뻘되는 수월 스님의 흔적을 찾아 1990년대 초반부터 소리 없이 간도와 흑룡강성을 십여차례나 누볐다. 명선 스님의 은사 계보는 수월 스님→묵언 스님→도천 스님(금산 태고사 조실)→명선 스님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고증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일과 공부를 둘로 생각지 않았지요. 늘 산에서 나무를 해와 대중을 돌봤고, 일하다 낫자루를 든 채 3일씩 삼매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 헤이룽장성 왕칭현에 가면 일제를 피해 간도 땅으로 들어가는 동포들에게 짚신도 삼아주고 병든 몸도 치료해주던 애국지사로서 수월 선사의 행적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명선 스님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수월 스님의 평전을 집필 중이다.

수월 스님의 면모를 손상좌 도천 스님이 이어받은 것일까. 도천 스님도 평생 일만하고 산다. 올해 100세가 되는 도천 스님은 지금도 인부 일을 거들며 노동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명선 스님은 선농일여(禪農一如)의 삶을 살아온 은사 스님을 위해 2007년 금강산 유점사 말사인 마하연까지 모시고 갔으며, 가는 길에 북한 당국을 설득해 수월 스님 진영 2점을 표은사 어실각에 모셨다.

과거 화엄사에서 20여명의 고아를 보살피며 한 생을 살았던 명선 스님은 호국도량 흥국사에서 보국안민과 문화재 보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또 한 생을 살고 있다. 고아들 중에는 더러 영관급 장교도 나왔고 스님도 나왔지만, 진로는 순전히 본인이 택했다. 스님은 뒤에서 말 없이 도왔을 뿐이다.

작은 키에, 포대 화상처럼 후덕한 분위기를 풍기는 명선 스님의 출가는 17세 때인 1952년에 이뤄졌다. 하루는 외삼촌 도광 스님이 찾아와 “누님은 아들이 많으니 내가 용식이를 데려가 중으로 만들겠소” 하자, 과거 노선사 태몽을 꾼 모친이 기다렸다는 듯이 “데리고 가서 큰스님 만들어 달라”고 선선히 승낙한 것이다.

외삼촌을 따라 당도한 담양 외추리 보광사는 말이 사찰이지 단칸 초막에 불과했다. 그곳에는 외삼촌의 도반 도천 스님도 있었다. 명선 스님은 공양주와 부목일, 채공일 등 무엇이든 도맡아 했다. “염불은 24시간 일념으로 해야 한다”는 도광 스님의 지시대로 천수경을 3줄씩 적어 밥 지을 때나, 나무할 때나, 물을 길어 나르며 달달 외웠다. 새벽 3시 도량석으로 아침을 열고, 밤 10시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코피가 터졌다.

배고픔과 졸음, 천수경 독송과 씨름하던 행자생활이 끝나고, 53년 광주 동광사에서 전강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명선(明煽)이란 법명은 이때 받았다. 스님은 55년 고대하던 해인사 강원에 입학해 4년간의 절 공부를 무사히 마쳤다. 이어 퇴설당 선원에서 두 철을 난 뒤, 60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다시 한 철을 났다. 스님은 ‘시심마(‘이 뭐꼬’와 유사한 공안)’라는 화두를 붙들고 전국 선원을 돌며 운수행각(雲水行脚)했다. 긴 만행을 끝낸 스님은 69년부터 75년까지 화엄사에서 총무국장 소임을 살게 되는데, 이때 끼니도 잇기 어려운 화엄사 대중 살림을 사느라 별의별 고생을 다했다. 그 공으로 75년 화엄사 주지에 오른다.

“인연이란 모아졌다 흩어졌다 하는 법이지요. 악을 지으면 악한 결실을 보고, 선을 지으면 선한 결실을 보게 됩니다. 악은 일체 삼가고, 선을 많이 지으세요. 세상사를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주지실을 나와 막 흥국사를 떠나려는데, 관광버스 3대에 나눠타고 부산에서 온 순례객들이 줄을 서서 대웅전 문고리를 붙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내력을 들려준다.

“옛날에 목수 스님 41명이 대웅전을 지으며 ‘누구든지 법당의 문고리를 만지면 3악도(지옥, 아귀, 축생)를 면하게 해달라’는 원을 세우고 1000일 기도를 했지요. 그 효험 때문에 대웅전 문고리가 닳아 구멍이 뚫릴 정도 입니다. 당시 스님들은 자신의 성불에만 매달리지 않고, 대중들에게 폭넓은 자비심을 행했지요.”

명선 스님은 흥국사에 면면히 내려오는 호국보민(護國保民)과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을 올곧게 이어가기 위해 오늘도 옷깃 여미고 법당에 앉아 부처님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여수=글·사진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 명선스님은

1936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했으며, 53년 광주 동광사에서 전강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58년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중앙종회 수석 부의장, 제19교구 본사 화엄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조계종 재심호계위원과 법규위원 등 주요 직책을 맡아 종단 안정에 이바지했다.

2007년 4월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현재 여수 흥국사 주지 겸 회주 소임을 수행하고 있다.

명선 스님은 화엄사를 호남 대중교육의 중심도량으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많은 중창불사와 함께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보살펴 ‘복지사찰 주지’라고 불리기도 했다.

흥국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에도 도량 면모를 일신하는 데 진력했으며, 여수엑스포 유치를 위해서도 지역 종교인들과 힘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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