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베푸는 보시행이 밥 먹고 자는 것처럼 습관화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월파 스님은 불교가 첨단과학이고, 붓다는 최고의 심리학자요 과학자라고 말한다. 불교 안에 고통을 벗어나는 빼어난 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월파 스님이 대나무 밭이 있는 보현대 뜰을 거닐며 중생 제도를 위한 사념에 잠겨 있다. |
문수산 산허리 주차장에서 잘 단장된 돌계단을 따라 천년고찰 문수사로 향했다. 길가에 핀 순백의 매화와 샛노란 생강나무 꽃이 봄을 알린다. 상큼한 봄내음에 취해 돌 서덜지대도 지나고, 기다란 바위틈도 빠져나가니, 앞이 탁 트인 바위가 나온다. 작은 산을 몇 굽이 지나 아슴푸레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남창 앞바다다. 몸을 돌려 문수산 정상 쪽을 올려다보니, 깎아지른 절벽 위에 절 한 채가 여법히 앉아 있다. 문득 상서로운 기운이 감돈다. 조계종 대종사 월파(71) 스님이 주석 중인 문수사다.
군인 신도를 만나고 있는 월파 스님을 잠시 기다렸다가 주지실인 보현대에서 마주했다. 스님은 나이답지 않게 풍채가 크고 강단져 보였다. 안경 너머로 모아진 작고 매서운 눈매는 범과 맞닥뜨려도 물러설 것 같지 않다.
“세계 불교 성지 보존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남보다 일찍 해외 여행을 했어요.”
기자의 긴장된 마음을 누그러뜨려 줄 요량인지, 월파 스님은 1980년대 집중 돌아보았던 동남아 불교국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한국은 있는 건물도 개인적 잣대로 부수고 다시 짓는데, 태국은 전쟁으로 훼손된 불교 사원을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한다는 이야기며, 재가불자들은 스님들의 공양(식사)이 끝날 때까지 문 밖에서 무릎 꿇고 합장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흥미로웠다. 또 우리나라는 해인사 목판 팔만대장경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산 하나 전체에 팔만대장경을 새겨 조성한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단청을 안 하는 일본 사찰에서는 여성의 맨얼굴을 보는 것처럼 단아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불교가 삶의 일부가 돼버린 이들 국민이 무척 부러웠던 모양이다. 이야기는 전 세계에 불어닥친 경제 한파로 옮겨졌다. 준비해 간 질문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우리가 무심코 버리는 수십조원에 이르는 음식물 쓰레기도 경제난을 부추긴 한 원인이 됐을 겁니다.”
음식을 자꾸 버리게 되면 그만큼 식량을 많이 수입해야 하며, 그에 따른 물가 앙등은 불을 보듯 뻔하단다. 가난한 국가는 더 큰 식량난을 겪으며 가난을 대물림할 터이다. 정량 식사가 정착된 것 하나만 봐도 일본이 우리보다 의식 수준이 몇십년은 앞섰다는 것이다.
“이번 경제난을 계기로 우리나라도 일대 의식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국민을 무섭게 여기고 자신을 비우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이 신뢰하고 따를 것입니다.”
◇문수산 정상 밑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문수사. |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멈추고 한번쯤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연을 느껴보라는 경책이다. 스님은 경제난 타파의 한 방안을 ‘비움’에서 찾은 것이다. 현대인의 질병도 욕심·노여움·어리석음 등 탐진치가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붓다의 연기법을 들어 “나의 욕심이 나를 해치고, 나아가 상대를 해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내가 욕심을 버리면 나 자신이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는 것.
월파 스님은 자신은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을 읊은 선시)도 없고, 남에게 알릴 만한 공적도 없다고 말했다. 승려로서 계율을 생명처럼 여기며 ‘부처님 법대로’ 살았을 뿐이다. 시류에 영합하기 쉬운 오늘의 세태에서 월파 스님이 보여주려는 것은 ‘기본에 충실한 삶’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1938년 울주에서 태어난 월파 스님은 어려서 산문에 들어왔다. 중학교 다니던 15세 때 동네에 자주 오는 김영광 스님을 따라 양산 통도사에 놀러 갔다가 스님들이 입은 회색 승복이며, 삭발염의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여 이듬해인 1952년 한국전쟁 중 머리를 깎았다. 월파 스님은 통도사에서 한국불교 근대화의 산파였던 취산(鷲山) 구하(1872∼1965)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했지만, 어린 나이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과 이어지는 불교정화운동의 회오리를 견뎌내야 했다.
스님은 ‘동진출가론’을 강하게 주장한다. 승려는 어릴 때부터 사찰에서 몸을 단련해야 한다는 것. 지금처럼 사회 물을 먹고 살다가 서른이 넘어 출가하면 절집 적응도 어렵고, 계율 지키기가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절에서 대학교육도 시켜주고, 본인의 능력에 따라 유학도 갈 수 있기 때문에 기왕 수행자의 길을 걸으려면, 더욱 일찍 산문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월파 스님은 통도사에 있을 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60년대 초반에 잠시 표충사 주지 직무대행을 맡았다. 그 후 통도사에서 다시 불러 불교의 4년제 대학인 강원(현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65년 통도사 보광선원 등 전국 여러 선방에서 참선 수행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가 다시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에 불려온 것은 1990년 초. 스님은 통도사 총무와 부주지 소임을 맡아 통도사를 크게 일으켜 세운 뒤, 1996년 주지에 임명됐다. ‘불교 수행자의 꽃’과 같은 본사 주지에 오른 것이다. 월파 스님은 구도의 사표로 삼았던 구하 스님을 잊지 못했다.
“구하 스님은 한국 승려 중 유일하게 일왕을 만나 해방을 위해 힘썼고, 통도사 안양암에서 만해 한용운을 만나 논 60두락(3만9600㎡)에 해당하는 기금을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건네주었지요. 한때 일왕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리기도 했지만, 독립운동을 지원한 자료가 발견돼 친일 누명을 벗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스님은 지난해 10월 ‘취산 구하대종사 민족불교운동 사료집’(전2권·통도사)이 세상에 선보인 바 있다. 월파 스님은 인자한 아버지 같은 구하 스님을 건강할 때 3년, 아플 때 4년 등 모두 7년 동안 시봉했다고 한다. 구하 스님에게 월파는 수족과 같은 존재였다. 열반에 들 때도 월파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구하 스님은 열반 전 상좌 월하(1915∼2003)에게 월파를 맡겼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기도 했던 월하 스님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월파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사형인 월하 스님 역시 나이가 23살이나 위로 부모와 다름없었다. 월하 스님은 어디를 가든 월파를 동행케 했고, 문상을 가서도 행여 다른 이들과 휩쓸려 ‘곡차(술)’라도 마실까봐 일찍부터 꼭 자신의 방에 불러다 놨다. 월파 스님도 이러한 사형의 뜻에 부응해 멀리 출장을 갔다가도 밤을 꼬박 새우며 차를 몰고 돌아와 사형을 감동시켰다.
주말이면 등산객 1000명 점심 공양
“습관이 참 무섭습니다. 좋은 습관은 자신의 운명을 180도 바꾸어 놓을 수 있지요. 남에게 베푸는 보시행이 밥 먹고 자는 것처럼 습관화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월파 스님은 주지로 임명된 1999년부터 문수산 등산객을 상대로 10년째 무료 급식을 해오고 있다. 문수사 공양간에는 평일에는 200명, 주말이면 600∼1000명이 점심 공양을 하고 간다. 이 때문에 고지대인데도 장 담은 항아리가 100개는 족히 돼 보였다. 구도의 길이란 비워야 채워질 수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에 스님은 오직 행으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수사 대웅전 앞에는 법당과 연결해 유리막사가 지어져 있다. 언뜻 보면 대웅전을 가로막아 경관을 해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신도 사랑에 있다. 대웅전이 벼랑 위에 있다 보니 좁을 수밖에 없고, 법회 때면 많은 불자가 대웅전 밖에서 비바람과 추위에 노출된다. 스님은 경관을 포기하고 실리를 택했다. 불가의 금도를 깨고 대웅전 앞에 보조법당을 설치한 곳은 전국 사찰에서 문수사가 유일할 것이다.
스님은 외부 출입을 가급적 삼가고 산사에서 한 달에 여섯 번 법문에 주력한다. 스님이 잘 들려주는 법문은 ‘부부는 상대를 보석처럼 귀히 여기라’는 가족 법문이다. 스님의 법문을 듣노라면 아내에 대한 죄송함, 남편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이 핑 돈다. 스님은 유머도 풍부해 애절하게 만들어 놓았다가, 어느새 웃음바다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문수사 신도들은 절에 올 때는 늘 회색빛 법복을 챙겨 입어야 한다. 불자는 법복을 입어야 본분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스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주말에 문수산에 오르면 법복을 단정히 차려 입고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고 오르내리는 보살(여성불자)들을 만날 수 있다. 월파 스님은 “문수사 신도들이 대한민국에서 기도를 제일 잘한다”고 치켜세웠다.
수행은 끊임없이 생명을 살리는 길. 스님은 누구에게나 평상심으로 대하고, 크든 작든 어느 절이고 법문 요청이 들어오면 달려간다. 얼마 전에는 서울 조계사까지 가서 법문을 해주고 왔다. 제한시간이 1시간인데, 눈 깜박할 새 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조계사 신도들은 법문을 잘 들었다며 소금 108가마를 문수사까지 올려 보냈다. 스님은 무료 급식을 의식한 듯, “소금은 오래 둘수록 간수가 빠져 좋다”며 빙그레 웃었다. 문수산으로 덕향(德香)이 번져나갔다.
스님이 지금까지 계율을 중시한 것은 계율이야말로 붓다 가르침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붓다 스스로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당부했다. 스님은 “계율은 법이요, 해탈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붓다의 가르침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니 후회할 일이 많이 생기지 않아서 좋다는 것이다. 수행자란 모름지기 수행에 몰두하되, 신도들 교육도 잘 시키고, 속인들에게도 말 없는 가르침을 줘 인격도야를 이루게 해야 한다는 것이 월파 스님의 지론이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어 자신만이 행복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
“종단에서 저는 해놓은 일도 없고, 이름도 미미합니다. 그러니 계획을 세울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수행자의 본분을 다하고 갈 뿐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어느덧 칠순을 넘기고 통도사 축산문중의 문장이 돼 버린 월파 스님. 해질녘, 대나무를 닮은 스님의 곧은 기상을 뒤로하고 문수산을 내려왔다. 스님은 다시 문수사 보현대 그 절대 고독의 시간에서 심신일여(心身一如)의 고요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울주=글·사진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월파 스님은… 신도들 눈높이 맞춰 포교 울산지역 불교 활성화 주역
1954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1969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미타암과 보광사 주지를 거쳐 15교구 본사 주지를 역임했다. 통도사 주지 재임 기간 당시 종정이자 총림의 방장이던 월하 스님을 극진히 모셔 종단과 총림의 대소사를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통도사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2007년 11월 조계종 중앙종회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지난해 10월 대종사 품계를 받았다. 현재 울산 문수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월파 스님은 울산지역 불교 활성화의 주역이다. 신도들의 눈높이에 맞는 보시 활동을 포교 방편으로 펼쳤다. 스님은 망실 재산을 되찾아 문수사로 돌려놓는 등 암자에 불과하던 사격을 현재의 문수사로 갖추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4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1969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미타암과 보광사 주지를 거쳐 15교구 본사 주지를 역임했다. 통도사 주지 재임 기간 당시 종정이자 총림의 방장이던 월하 스님을 극진히 모셔 종단과 총림의 대소사를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통도사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2007년 11월 조계종 중앙종회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지난해 10월 대종사 품계를 받았다. 현재 울산 문수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월파 스님은 울산지역 불교 활성화의 주역이다. 신도들의 눈높이에 맞는 보시 활동을 포교 방편으로 펼쳤다. 스님은 망실 재산을 되찾아 문수사로 돌려놓는 등 암자에 불과하던 사격을 현재의 문수사로 갖추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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