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기독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직으로 근무하다 2001년부터 전업작가로 살아온 정유정씨는 대학 3학년 여름에 처음 정신병원 실습을 나갔다가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는 걸로 소일하는 젊은 남자를 접했다. 그를 만나고 난 뒤 오랫동안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이 질문이야말로 이 소설의 출발점이었는데, 세 번을 고쳐 쓴 끝에 완성시켰다. 꾸준히 책이나 전문가를 통해 정신과학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를 병행했지만 현장을 접하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에 두 번이나 습작을 폐기해버렸다. 그러다 우연하게 선배의 도움으로 광주 인근의 폐쇄병동에 들어가 1주일 동안 환자들과 생활한 뒤에서야 소설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정신병원을 무대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이수명이라는 25살짜리 남자와 동갑의 류승민이라는 사내가 중심인물이다. 수명은 어머니의 끔찍한 죽음 이후 공황장애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원을 전전하게 된 불행한 캐릭터다. 귓속에 어떤 놈이 들어와 살면서 늘 지시를 한다.
“놈은 점점 집요해지고 대담해졌다. 귓속에서 뛰쳐나와, 사방에서, 수십 개의 목소리로 충동질하고 악담을 퍼부었다. 어머니의 복수를 하라고. 아버지 목에 가위를 꽂아버리라고. 그러지 않으면 나까지도 어머니 꼴이 될 거라고.”(54쪽)

소설은 시종 짧은 문장으로 이어지면서 긴박하다. 긴박하지만 사태를 서술하는 정조는 낙천적이다.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전기충격 장면에서조차 서술자는 정작 딴청을 부리듯 명랑하다. 자칫 어두움 그 자체로 빠져버릴 내용과 배경을 빛 쪽으로 끌어내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눈이 멀어가는 승민이 끝내 세상 끝으로 날아가면서 수명에게 던진 질문.
“너라면 어떻겠냐? 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날아다녔던 세상이 어느 날 비행금지구역으로 변해 있다면.”(284쪽) 그는 마지막 글라이더 비행을 앞두고 자답한다.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286쪽)
가장 불행한 세대라고 자조하는 이즈음 ‘88만원 세대’들이 이 책을 접한다면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 같다”고 작가는 말했다. 운명이 삶을 침몰시켜도 세상의 총구를 향해 심장을 내밀고 질주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337∼338쪽)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