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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王 히로히토가 신사참배 안한 까닭은…

입력 : 2009-07-28 17:32:18 수정 : 2009-07-28 17: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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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나라히코 교수의 ‘맥아더와 히로히토 회담’ 8월이면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전율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5년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고, 일본은 패전의 멍에를 안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침략자이면서 가해자인 일본은 전후 책임을 거의 지지 않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향유하며 경제성장을 이뤄낸다. 가혹한 식민지 지배의 희생자로 피해자였던 한국은 분단과 전쟁의 비극에 노출되며 오랫동안 ‘평화와 민주주의’ 흐름에 빗겨나 있었다.

무엇이 이런 역설을 불렀을까. 일본 지식인이 그 의문의 퍼즐을 맞춰냈다. 도요시타 나라히코 일본 간사이가쿠인대학교 법학부 교수는 종전 당시 일왕이었던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정치적 행위’와 ‘외교’에서 의문의 실마리를 찾았다. 히로히토가 세상을 뜬 이듬해인 1990년 나라히코 교수는 전후 11차에 걸친 ‘맥아더와 히로히토 회담’이 내포한 정치성을 분석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 이후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나라히코 교수는 히로히토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펼친 ‘고도의 정치적 행위’를 들여다보고, 이를 분석했다.

20년 연구를 중간 결산하며 나라히코 교수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히로히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려 했던 맥아더로 대표되는 미국과, 그런 미국에 적극 협조하며 천황제를 사수했던 히로히토가 전략적 거래에 나섰다. 이 거래로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 목숨은 물론 천황제까지 지켜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군기지를 두면서 안보 방위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미국에 끌려다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였다.

이런 결론을 도출한 나라히코 교수의 ‘히로히토와 맥아더’(개마고원)가 최근 번역돼 출간됐다. 책이 번역된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해 말부터 학계에서 이 책에 보인 기대감은 지대했다. 책이 택한 부제는 ‘일본의 전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히로히토 주변의 이야기를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그가 어떻게 전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평화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를 분석한 책이기도 하다.

전후 히로히토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는 ‘도쿄 재판’이었다. 히로히토는 침략전쟁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의 짓이라고 반박하면서도 도덕적 책임은 피하지 않겠다는 이중의 자세를 취한다. 모순되는 주장으로 그는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도덕적 비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다음 위기는 한국전쟁. 히로히토는 전쟁에서 한국과 미국이 패하면 일본에서 전쟁재판이 펼쳐지고, 천황제도 붕괴할 것으로 여겼다. 그가 꺼낸 카드는 미군의 일본 안전보장. 바로 미군의 주둔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히로히토가 1978년 이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라히코 교수는 “야스쿠니 측이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을 합사했기 때문에, 군부 대신 자신을 택한 맥아더로 상징되는 미국에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도 신사 참배를 할 수 없었다”고 분석한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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