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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는 성의 독점권… 본능이 규제의 틀 찢어나가…
여권 신장될수록 무력화돼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합법적으로 성적·정서적 공동체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회의 최소단위체인 가족 속에서 성별, 가치관, 관점,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비폭력적이고, 비파괴적으로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한쪽에서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떤 미친놈이 헛소리를 하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당신, 오해 마시라. 발칙한 이 말은 2000년도에 오늘의작가상을 거머쥔 신인작가 이만교가 내놓은 동명의 소설 제목이다. 이때 미친 짓이라고 질타당한 결혼은 일부일처제 결혼을 가리킨다. 이 결혼 동맹의 핵심은 배타적 성의 독점권이다.

이 동맹의 느슨해진 징후를 가장 먼저 소설가들이 읽어낸다. 2006년에 나온 박현욱의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더욱 발칙하다. 젊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어느 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이혼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아내는 ‘나’와 결혼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내를 사랑했기에 마지못해 이 기상천외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당신 소원 들어줄게. 원하는 대로 해. 어디 한번 가는 데까지 가보자.” 아내의 이 제안은 여성의 자아 정체성이 강화되고 성적 욕망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여성 스스로의 자신감 표출이다. 결국 아내는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에게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결혼식은 잘 끝났으며 신혼여행 다녀와서 보자고….”

물론 소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는 일부일처제 결혼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비독점적 다자결혼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조(前兆)의 예광탄이다. 어째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결혼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의 발현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굴복한 결과이다. 인류는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학교나 교회 등을 통해 반복적인 학습과 세뇌로 그것의 상대적 우월성을 퍼뜨려왔는데, 이는 다분히 정치사회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으로 결혼의 외피를 두텁게 감싸 보호한다. 이때 도덕은 몸과 정신을 옥죄는 규제 체제다. 결혼이 느슨해지는 것은 도덕에 옥죄어 있던 본능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그 규제를 찢고 나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결혼은 존재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황홀한 마법이 아니다. 우리는 외로울 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진정한 자기로 회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에 귀속해 있을 때 나는 가족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다. 심연으로서의 나, 자유의지로서의 나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령들을 받아들이고 그 의무들을 수행하는 동안 잊어야 한다. 임신, 출산, 육아라는 고단한 의무들, 법정 노동 시간을 무시로 넘어서는 가외의 가사 노동, 관계의 구속, 성차별, 불평등, 상호 배타적 독단의 충돌, 저열한 의심과 질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혼 관계 안에서도 충족되지 않는 결핍과 부재가 여전하고, 아울러 결혼과 가족은 그것을 얻는 대신에 지급해야 할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우선 나만의 시간, 나만의 자유, 오롯이 나 자신이 되는 것, 자아실현 등등을 유보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한낱 가족이기주의를 만들고 그것에 굴종하기를 요구하는 끔찍한 곳임을 일러바친다. 가족의 구성원이라도 가족이기주의에 힘을 보탤 수 없을 때 가족 안에서 벌레로 전락한다. 가정은 교화와 선도라는 명분 등으로 정신적·육체적 학대가 드물지 않게 자행되는 곳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감히 ‘외롭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온하고 불경스러운 행위로 여겨진다.

사랑의 열정이 식고 결혼이 외로움의 유일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우리는 인습과 타성으로 섹스, 여가 시간 함께하기, 공허한 대화들, 각자의 역할에 따른 의무의 메마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듯 결혼은 밖에 있는 사람에겐 천 개의 빛나는 거울이지만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천 개의 조각으로 깨진 거울이다. 그 거울이 산산조각 난 뒤 자신의 심연으로 회귀하는 길을 잃고 종교, 사교 활동, 쇼핑 중독, 새로운 직업, 자식의 가능성 개발하기 등등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는 일은 드물지 않다.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신화가 깨진 뒤 그토록 굳건하던 일부일처제 결혼 동맹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그 전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다. 결혼에 드는 기회비용에 비해서 효율성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미혼(未婚)이나 비혼(非婚)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결혼의 과실을 나눠가질 수 있게 된 현실의 변화가 그 배경이다. 과거에는 결혼이 섹스의 합법적 허가증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성해방으로 결혼 관계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성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여성들이 정규직 취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진 것도 결혼 제국의 쇠망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고 삶의 기반을 굳힌 여성들은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서 굳이 존재증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사랑의 감정이 다 소진된 뒤에도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의무로 얽힌 결혼 제도라는 족쇄를 풀 수 없다는 모순은 일부일처제 결혼의 입지를 더욱더 좁게 만든다.

사회운동가 목수정이 선택한, 체제순응적이고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기제가 잔존하는 일부일처제 결혼을 시민연대계약으로 대체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터다. 프랑스 법이 용인하는 시민연대계약은 합법화된 결혼과 동거를 절충해서 만든 제도쯤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목수정이 굳이 결혼을 마다하고 한 남자와 시민연대계약만을 하고 사는 것은 관습과 제도의 구속에서 자유로워 지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결혼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거부감 때문이다. 목수정에 따르면 한국에서 결혼이 “여자에게 극단적으로 불리한 선택인 것은 한 남자와의 서약인 동시에,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그 남자의 친인척에 대한 일종의 노예서약”이고, 그래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들을 가장 잘 농축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의 자명한 진리를 보여주는 제도가 아니다. 인류학적 고찰을 한 사람들에 따르면 결혼이 더 이상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결혼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그 상처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 점을 증명한다. 가장 가깝게 있는 사람은 상처 입히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커진다. 내 안의 많은 열망은 결혼의 강고한 폐쇄적 조건 아래서 죽고, 가슴에 외로움의 공동은 커져 버린다. 그러니까 사랑과 결혼이 외로움에 대한 근본적 대안은 아니다.

저 위대한 지혜의 시인 칼릴 지브란은 결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공존을 취하되 서로 자유로움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함께 서 있되,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고 한 것은 지나친 관심이 구속이 되고 구속은 영혼이 성장하는 데 방해물이 되는 까닭이다. 참나무나 사이프러스나무도 서로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는 법이다. 다시 칼릴 지브란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고 말한다. 외로움은 개체화에 따른 산물이니까 그것에서 도망가는 일은 어리석다. 도망가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생명이고, 살아있음의 기쁨이다. 외로움이 무서워서 결혼하는 것은 실패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함께 있되 제도의 힘을 빌어서 상대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상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의 외로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생명을 고양하고 영혼의 점진적인 진화를 이루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키우는 에너지로 바꾸려고 하는 게 현실적이다.

장석주 시인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박현욱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 문이당, 2006

●목수정,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레디앙, 2008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외 옮김, 새물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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