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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56〉 동양신화 전문가 정 재 서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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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27 10:59:21 수정 : 2010-07-27 10: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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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상상력 제대로 이해해야 균형잡힌 사고 할 수 있어”
정재서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동양 신화 전문가다. 동양 신화를 제대로 바라봐야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이 시리즈의 55회에서 서양 신화 전문가인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를 인터뷰한 뒤, 정 교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는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면서 “세상의 주인으로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것도 중요한데, 그 중심에 신화와 상상력을 둘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제원 기자
#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을 꿈꾸다

약속 시간이 남아 이화여대 교정을 둘러봤다. 여름 교정은 한가했다. 냉방이 잘 된 건물 내에는 학생들이 넘쳤다. 외국계 커피숍과 현대적 감각이 묻어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학생들의 유쾌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깔끔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인문관 6층에 자리 잡은 정 교수 연구실 문을 열었다. 이화여대 다른 연구실보다는 넓어 보였다. 연구실 측면은 물론 중앙까지 십자형의 책꽂이가 죄다 장악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공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종이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20세기 이전에 흔히 접했던 책과 복사지의 오래된 종이 냄새가 여전했다. 화려한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괜히 마음이 풀어졌다. 여유 있는 눈길로 연구실의 책장에 시선을 두자 정 교수가 말을 건다. “사진 찍을 곳이 마땅치 않을 겁니다. 공간이 없어요. 정리를 못 해서 너무 비좁습니다.”

그랬다. 다른 층의 연구실보다 넓어보이는 정 교수의 학문 도장(道場)에는 책들이 숲 속의 나무들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정리’의 뜻은 연구실의 책을 다른 곳에 보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발해사와 중국 신화는 물론 그리스 신화를 다룬 여러 책을 정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열병하는 호두깎기 인형처럼 책장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을 그는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동양 신화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정 교수의 학부 전공은 생물학이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중문학을 복수 전공한 게 오늘의 그를 만든 시초가 됐다. 그는 “서울대가 관악 캠퍼스로 옮기기 전에는 오히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소통하는 현상이 짙었다”며 “도올 김용옥 박사를 비롯해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이갑수 궁리출판사 사장,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이 생물학과 동문으로 모두 학문 소통에 앞장서고 있는 이들”이라고 설명한다.

정 교수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4년 내놓은 ‘불사의 신화와 사상’(민음사)을 통해서였다. ‘불사의…’는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해 단행본으로 내놓은 것으로, 도교의 상상력을 다룬 책이다. 박사 과정에 들어선 이래 그는 우리 땅에서 동양 신화는 제쳐놓고, 서양 신화가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 왔다. 동아시아 상상력의 근원을 파고드는 정 교수는 “그리스·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가 한국 땅에서도 상상력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 것은 잘못”이라며 “문·이과 구별이 학문적인 편협성과 분과주의적인 생각을 낳는 것처럼, 서양 신화 중심적인 시각은 우리의 상상력에 제약을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서양에서 인어는 인어 아가씨와 결합하지만, 동양에서 인어는 인어 아저씨와 연결됩니다. 동아시아의 상상력은 서양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물론 동아시아 상상력의 기원을 중국신화에 두고 있지만, 문화적 사고 방식에 국경의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에는 개별 국가가 아닌 동양의 신화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 신화는 상상력의 원형

그렇다고 동양 신화가 우리의 신화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일부의 지적을 곧잘 받아서인지, 정 교수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 개국 설화 등 각종 이야기가 넘쳐나던 신화시대의 내용에는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주변의 문화가 용해돼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의 민족이나 국경 개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대 문화에서는 세상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건국 신화만 해도 중국의 여러 나라와 한반도의 고대 국가가 난생설화로 공통점을 보이고 있어요.”

단군 신화에 기후를 관장하는 신들로 등장하는 풍백·우사·운사는 중국 신화에도 있다. 고구려 개국 신화에 등장하는 ‘하백’도 중국 신화에 등장한다. 고대 동양 신화가 어느 민족의 이야기로만 이해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가 보기에 근대 100년 사이에 한국인들은 상상력의 원형을 망각해 왔다. 그는 이를 ‘상징계의 전도와 교란’으로 해석한다. 특정 현상이나 일에 대해 반대로 인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가령 영험한 대상으로 인식되던 용(龍)이 어느 틈엔가 어린이들 사이에 사악하고 나쁜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동양 신화에서 용꿈은 길몽이었지만, 서양 신화에만 노출된 아이에게 물어보면 다릅니다. 이들 아이에게 용꿈은 없어요. 아마 몇 세대가 흐르면 용꿈은 나쁜 꿈이 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우리 문화를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물론 서양 문화를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를 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문화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는 서양 중심적인 신화만을 입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상상력의 제국주의를 막는 과정’이라고 의미 부여한다.

몇 세대 전 조상이 존중했던 신화와 문화가 무시되는 것은 물론 정반대로 해석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들기까지 했다. 가령 ‘저승을 믿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미개한 이들이 한다’는 인식이 퍼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음식을 가려먹으면 영양실조가 찾아오듯이 문화의 편식은 가치관과 사고체계에 치명적인 위험을 부른다.

‘문화적 편식 극복이야말로 이 시대의 당위’라는 게 정 교수의 생각이다. 신화를 통한 문화 다양성 확보는 세상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게 하고, 역사적 정답에 충실한 해석을 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 현대 과학기술에도 스며든 옛 신화

그렇다면 서양 신화와 비교되는 동양 신화의 또 다른 특징은 무엇인가. 동양 신화는 반신반수(半神半獸) 경향이 강하다. 신성(神性)과 수성(獸性)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설명하는 게 동양 신화다. 이에 비해 서양의 신화는 인간이 중심이 된다. 신도 완벽한 인간으로 나온다. 동양이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서양은 인간 중심주의를 선언한 셈이다. 서양은 철저하게 동물성(動物性)을 무시하지만, 동양은 동물을 숭배하기까지 했다. 이런 문화는 실은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 교수는 “과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신화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신화는 인류가 축적한 소중한 이야기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문화 영역은 물론 다른 영역에서도 신화는 곧잘 이용되고 응용된다. 신화 이용에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중국만 하더라도 달 로켓 이름으로 ‘창어’를 쓴다. 창어는 달의 여신 ‘항아’의 중국어 발음이다. 예쁜 여인네를 말하는 ‘월궁의 항아’는 우리 고전에도 자주 등장한다. 미국의 지대공 미사일 ‘허큘리스’는 서양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영어식 발음이다.

동양 신화를 강조하는 그의 생각은 학부 강의에도 반영돼 있다. 그가 교양과목으로 개설하는 강좌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는 늘 수강생으로 붐빈다. 학기마다 수강 인원이 정원을 채우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수강 제한 인원을 500명에 두면 500명이, 300명에 두면 300명이 강의실에 들어선다. 서양 중심의 신화공급에 질식한 대학생들이 학문 편식을 벗어나고자 적극 반응한 까닭이다.

학생만이 아니다. 성인에게도 신화를 읽는 장점은 있다. 신화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신화에는 인간의 숨은 욕망과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이 때론 윤리에서 벗어난 일을 소망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신화를 접하다 보면 이러한 일이 결코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일탈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신화가 현대의 독자에게 여유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bali@segye.com

■정재서 교수는…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1952년 충남 온양 출생. 서울대 문리대와 서울대 대학원 중문과 졸업. 하버드 옌칭연구소에서 연구. ‘상상’의 편집위원으로 1994년부터 99년까지 활동. 잊혀진 중국 신화를 동양 문화의 원형으로 끌어올린 학자로 평가받는다. 서구 중심의 신화주의 시각을 깨고 동양 신화도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저서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신화’, ‘불사의 신화와 사상’, ‘동양적인 것의 슬픔’, ‘동아시아 연구’, ‘동아시아 여성의 기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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