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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사람] 달빛을 그리는 작가 이재삼씨

입력 : 2011-03-08 21:12:01 수정 : 2011-03-08 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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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내려앉은 달빛 풍경… 현대인의 우울증 보듬어줘”

한겨울 밤 달빛을 벗삼아 산길을 걸어 본 적이 있는가 유난히 환하게 빛나던 눈밭을 기억하는가.

먼길을 떠난 자식들의 안녕을 빌기 위해 어머님이 떠 놓으신 정화수 같은 달빛이다 화가 이재삼(51)은 달빛에 한국사람만의 문화적 유전자가 함축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달빛을 그리는 이유다.

그림 속 소나무와 매화 그리고 폭포와 대나무는 달빛을 흠뻑 품고 있다. 달빛을 온몸으로 흡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예전 여인네들이 회임을 위해 달빛을 한껏 쐬던 모습이 연상된다 달의 차가운 느낌은 군자의 덕과 맑고 높은 절개의 상징이기도 했다 정화와 신비의 기운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요즘 달빛 속 소나무를 주로 그린다 오랜 시간 소나무들을 찾아 전국을 떠돌기도 했다 어린시절 고향 영월의 단종릉에서 본 소나무가 가슴 한쪽에서 숙성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나무는 한국인의 삶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요 태어나면 집 대문에 솔가지가 꽂힌 금줄이 처지고 소나무로 지은 한옥에서 살지요 죽어선 소나무 관에 들어갑니다

그는 그동안 영양의 만지송 합천 화양리의 소나무 지리산 천년송 등 수많은 소나무들을 만났다 오래된 소나무에선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300년 이상을 버텨 온 소나무들이 서있는 땅 역시 나무 못지않게 예사로운 곳이 아니었어요 천기와 지기가 만나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리 시쳇말로 명당이지요

가끔 그는 신비로운 경험도 했다

이상하게도 소나무가 남성같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그곳에서 할아버지를 만나게 돼요 반대로 여성스러우면 할머니를 조우하게 됩니다 대개 소나무를 그리러 왔느냐고 묻거나 이처럼 잘 생긴 소나무는 없을 거야라며 말을 던지곤 가버리셨어요

이처럼 땅거미가 질 무렵 찾은 소나무 앞에서 만나 잠깐씩 이야기를 나눈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다시 여쭙고자 찾을 땐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셨다 그는 산을 지키는 산신이 다른 잡귀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가끔 소나무를 찾아 한참을 그리다 보면 뒷목이 쭈뼛거릴 정도로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요 역시 소나무가 지니고 있는 신령함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달빛 아래 적요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그린 작품 앞에 서 있는 이재삼 작가. 그는 “우리네 어머님이 장독대 위에 떠놓은 정화수 같은 것이 달빛 정서”라고 말한다.

달빛과 소나무는 그렇게 한국인의 감성코드로 접선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만나는 대상들은 주로 달이 가장 높이 떠있는 밤 속에 있다 이는 작가가 밤에만 여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낮에 만난 대상들이 가장 완벽한 자기 발현의 시간으로 밤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달빛을 쫓아 세상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무섭게 밤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와 폭포 등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현란한 태양에서 보이는 이성적인 여행보다 달빛으로 보이는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여행을 그린다

달빛을 받은 산천초목에선 꿈이 사뿐히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흑백 사진에서 오는 오묘한 느낌 같은 것이지요

달은 그래서 예부터 향수를 달래주고 꿈을 품게 해주는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이기도 했다 달을 보고 기원했던 이유다

작가는 꿈이 내려앉는 달빛 풍경이야말로 현대인의 우울증을 보듬어 주는 약이라고 말한다 꿈을 꾸게 하고 내면으로 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달빛처럼 주변과 자신을 살핀다면 이 시대가 만든 우울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든 이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들고 그것이 질환으로 발전될 수 있는 기막힌 여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우울들은 이성이라고 하는 지극히 폭력적인 사고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계몽이라고 하는 자기 중심적 생활습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는 그렇다면 태양이 아닌 달빛처럼 이성이 아닌 감성적으로 사고해 보자고 말한다 발전과 개발이 아닌 깊이와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고 그래서 조금은 더 천천히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울이라고 하는 질곡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작가는 목탄으로 달빛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목탄을 캔버스 천에 칠하고 접착제로 안정화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며 화폭을 만들어 나간다 천 위에 목탄을 집적시키는 작업은 중노동에 가깝다 마스크까지 착용해야 할 정도다

큰 스님의 육신이 타 사리를 남기듯이 제 그림은 나무를 태운 재인 목탄이 달빛영혼의 사리로 거듭나는 셈이지요 촛불이 타 불빛을 만드는 것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지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목탄으로 만들어낸 화면은 어둡고 깊다 적막하고 적요하기까지 하다 빛을 흡수해 버리는 블랙홀처럼 깊은 공간으로 빠져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가장 단순하고 언제 어디서든 쉽게 만들거나 구할 수 있는 목탄을 검은색이 아니라 검은 공간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림 속 소나무들이 자연광에서 더욱 입체감이 나는 연유다

◇달빛 시리즈. 작가는 “달빛은 한국사람만의 문화적 유전자가 함축된 빛”이라고 강조한다.

초기엔 먹과 목탄을 함께 사용했어요 그러다 점차 목탄으로 기울었고 목탄이 저의 작품과 궁합이 맞았어요 사실 목탄은 검은색이 아닌 검은공간입니다 이것은 드로잉의 재료가 아닌 회화입니다 목탄은 나무를 태워서 숲을 환생시키는 영혼으로서의 표현체입니다 사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 그 고유한 형상의 바깥(너머)이 만들어 내는 빈 공간입니다 그 어둠 그 여백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비경이 있습니다 일종의 초월일 것입니다 달빛에 비쳐진 소나무의 신령한 존재가 드러나는데 달의 빛 달의 소리와 음혈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공무원처럼 산다고 말한다 작업실로의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는 얘기다

작가처럼이 아닌 작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예술가이기보다 이 시대의 예술장인이고 싶습니다

그의 엄청난 작업량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목탄을 다루면서 그는 색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색은 그 자체로 에너지와 자기 정체성 즉 각자의 성격과 개념들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흑백은 자기의 개념을 갖기보다는 대상의 본질적 형태에 더 집중합니다 그 흑백의 극치로서 목탄은 단순히 재료이기 이전에 저에게는 대상을 감지하는 안테나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는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선택하는 재료에서부터 작가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재료에 집착하다 보면 재료가 지니고 있는 성질 그 자체에 매이게 된다 재료가 수단이 아닌 곧 작품이 되어 버리는 묘한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저에겐 목탄은 재료이기 이전에 작품을 대하는 저의 철학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기도 하지요 목탄의 성질에 매이지 않으며 그것을 하나의 공간으로 저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저의 아바타로 삼고 있습니다

9일부터 4월3일까지 통의동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에선 5m가 넘는 크기의 달빛 소나무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압도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부드럽고 은은하고 열정적이고 때로는 차디찬 냉정함으로 우리를 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는 얘기다 한겨울 새벽 부엌일을 정리하고 들어오시는 어머니의 서늘한 옷자락에서 느껴지던 그 신선함과 짜릿한 겨울바람 그리고 막연한 안정감 이재삼의 달빛들은 그렇게 소나무를 폭포수를 그리고 매화나무 꽃 가지들을 타고 흐른다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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