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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16) 평요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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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7-25 21:32:31 수정 : 2012-07-25 21: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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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상인들의 진취적인 기상 건물마다 고스란히 남아 수십 년 동안 중국을 여행하면서 품어온 열망의 하나는 며칠 만이라도 중국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도시에서 생활해 보는 것이었다. 중국적인 정취가 남아있는 시골마을이나 조그만 소읍에서 머물러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방도, 집도, 거리도 과거의 역사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무협지 속의 인물들처럼 객잔(客棧)에 머물며 중국이란 나라를 호흡해보고 싶었다.

중국에 첫발을 디딘 1991년에 요서주랑(遼西走廊)에 위치한 흥성고성(興城古城)에서 하루를 숙박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열하일기’의 길을 따라가기에 바빴고, 그곳에서는 오로지 충신 원숭한(遠崇漢)에 대한 우리 선조의 한스러운 추모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산시(山西)성의 평요고성(平遙古城)을 향해 떠난 것은 그런 열망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평요고성을 향해 떠난 데에는 ‘진상(晉商)’ 혹은 ‘산시상인(山西商人)’이라 부르는, 중국에서 가장 이름난 상인집단을 배출한 고장의 모습을 봐야겠다는 의지도 숨어 있었다.

중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산시의 장사꾼 교치용(喬致庸)의 일대기를 그린 ‘차오자 다위안(喬家大院)’이란 드라마를 한국의 케이블 TV에서 보았을 것이다. 후메이(胡?) 감독이 연출을 맡아서 2006년부터 CC TV에서 45부작으로 방영한 이 대작은 교치용 역을 맡은 천젠빈(陳建斌)의 뛰어난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1991년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궁리(鞏?)를 발탁하여 ‘홍등(紅燈)’을 촬영한 곳이 바로 ‘차오자 다위안’이란 사실이 인터넷과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한·중 양국에서 모두 상당한 시청률을 기록했었다.

명청시대의 건축과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는 고성 ‘평요고성’. 중국 4대 고성 중 대표적이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나 역시 ‘차오자 다위안’을 보고 감동했으며, 그 감동이 ‘대진제국(大秦帝國)’ ‘주원장(朱元璋)’ 등의 대작을 연이어 보게 하였다. 그러면서 중국의 TV 드라마가 홍군의 영웅적 투쟁을 그린 천편일률적인 애국 역사 드라마를 벗어나 빠르게 발전하는 속도에 놀랐었고, 그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무궁무진한 소재와 장대한 스케일과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력에 놀랐었다. 어쨌건 ‘차오자 다위안’은 나로 하여금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진상’에 대해, ‘산시상인’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고 ‘평요고성’을 향한 내 여행의 열망을 부추겨 주었다.

뤄양(洛陽)에서 버스를 타고 ‘평요’를 향해 북상하는 길은 매혹적이었다. 버스는 산시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로 ‘평요’까지 가장 빨리 가는 버스라고 했지만, 좌석제라는 애초 말과는 달리 수많은 입석 승객을 태웠고, 싼먼샤(三門峽)·윈청(運城)·린펀(臨汾) 등 설 수 있는 모든 도시에 정거했다. 그러나 나는 중원(中原) 문명의 후예이며, 진왕(晉王) 이세민(李世民)을 선조로 모신 산시 사람들을 하찮은 차장이 윽박지르는 곤혹스러운 모습을 안타깝게 관찰하기에 바빠서 짜증 따위를 낼 여유가 없었다. 또 나 자신이 윈난(雲南)이나 쓰촨(四川)의 빼어난 자연 풍경보다 인간의 역사가 담긴 풍경과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채 쓸쓸히 퇴락하고 있는 풍경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짜증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남대가 북쪽에 위치하는 평요고성의 대표 건축물인 시루.
먼지 날리는, 현대 중국의 발전에서 뒤처진, 산시의 오래되고 가난한 동네 하나하나가 강남이나 해안지역의 어떤 화려한 신흥 도시보다 나에게는 매혹적이었고 소중했다. 그것은 내가 자연풍경은 과거와 현재가 동일해서 역사적 상상력의 개입이 차단당하는 반면, 인간의 역사를 간직한 풍경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퇴락 사이에 상상력이 무한하게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의 남쪽 지방보다는 북쪽 지방을 훨씬 오랫동안 헤매고 다녔었다.

평요고성의 예스러운 정취와 생생한 맛을 느끼자면 아침과 밤을 이용해야 한다. 도시 전체가 명청시대의 건물로 이루어진 평요가 풍기는 예스럽고 고즈넉한 정취는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만 맛볼 수 있다. 낮이 되면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몰려든 내국인 관광객과 유럽과 미국에서 몰려온 외국인 관광객들로 성곽 둘레 6㎞의 조그만 도시는 무척 소란스러워져서 시루(市樓) 일대의 중심가 거리는 걸어다니기조차 힘들다.

주요한 건물군의 내부를 보자면 불가피하게 낮의 개방시간대를 이용해야 하지만, 외부의 모습과 거리 전체의 풍모를 제대로 느끼려면 오전 6시쯤 천천히 시루를 기준으로 삼아 동대가(東大街)에서 서대가(西大街)로, 남대가(南大街)에서 성황묘가(城隍廟街)로 산책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낡은 벽돌 건물들이 속삭이는 사연을 들을 수가 있다. 한때 중국에서 돈이 가장 많았던 도시가 지닌 그 부유함과 당당함에 대한 이야기를 건물과 건물들이 이어지며 만들어진 낡은 거리에서, 그 퇴락한 상처에서 들을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평요가 가졌던 화려한 번성의 모습을 현재 속에서 실감나게 느끼자면 밤에 거리를 걸어보아야 한다. 특히 줄지어 홍등이 밝혀진 화려한 남대가 거리를 공갈빵처럼 생긴 스터우빙(石頭餠)을 씹으며 어슬렁거리다가, 산시 사람들로 북적대는 비싸지 않은 식당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꼬치에 꿰어 구운 양고기와 쇠고기를 안주 삼아 산시의 대표적 술인 독한 펀주(汾酒)를 몇 잔 마시면, 옛날의 당당함과 강건함으로 되돌아간 산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평요고성 중심가인 남대가. 청나라 시기 50%의 중국 금융기관이 이 거리에 모여 있었다.
평요의 남자들이 낮의 초라함을 벗고 옛날의 강건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이제 막 머나먼 행상길에서 돌아온 장사꾼들이 나누는 험난한 인생길에 대한 이야기와, 한두 명쯤은 손쉽게 때려눕힐 것 같은 표국(標局) 사내들이 타락한 관리들의 횡포와 사나운 산적 떼의 위협을 뚫고 위탁받은 물건을 무사히 운송한 무용담을 들을 수가 있다.

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인집단은 산시 출신의 진상과 후이저우(徽州) 출신의 휘상(徽商)이다. 그중에서도 진상이 첫째 가는 집단이다. 이처럼 진상이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상인집단으로 확실하게 부상하는 것은 명나라 건국부터다. 이후 서양 열강의 침략과 함께 청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진상은 중국의 경제를 좌우하며 영광의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진상의 이러한 영광스러운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산시의 북부지역이 북방의 몽골과 접한 척박한 변경지역이라는 지리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한족의 명제국이 가장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운 대상은 중원에서 북방으로 퇴각한 몽골이었다. 이를테면 연왕(燕王)이었던 영락제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일에는 베이징이 자신의 근거지라는 점과 함께 몽골의 침입을 방어해야 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명제국은 몽골 때문에 동쪽의 요동진(遼東鎭)으로부터 서쪽의 감숙진(甘肅鎭)에 이르기까지 9개의 변진(邊鎭)을 설치하고 약 50만에서 80만에 달하는 대군을 주둔시켰으며, 베이징으로 향하는 길목인 산시성의 다퉁(大同)과 인근 지역에는 특히 많은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막대한 병력의 주둔에는 식량과 소금의 원활한 조달이 필수적이었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제국은 군대가 주둔하는 변경지역에 상인들을 함께 주둔시켜 식량과 소금을 조달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으며, 이 같은 정책에 호응하여 부상한 집단이 바로 산시상인이었다.

진상의 활약은 그러나 그런 시류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인(商人)이라는 말은 상(商)나라 사람이 장사를 잘한 데서 생긴 말이며, 그 어원적 의미에는 행상(行商)을 뜻하는 ‘상(商)’과 좌상(坐商)을 뜻하는 ‘매(買)’가 들어있다. ‘상매(商買)’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고, 이 상인의 의미에서 진상의 활동은 행상 쪽에 현저히 기울어져 있었다. 진상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중국 전역을 누비면서 능동적으로 새로운 장사 품목을 찾아내고 사업을 확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차오자 다위안’이란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멀리 북방으로 진출하여 몽골·러시아와 벌인 차 무역이며, 또 다른 예가 표호(票號)라는 금융사업과 표국이라는 운송사업이다.

평요고성 북쪽 40㎞ 정도 떨어져 있는 치현인 교가대원. 청대 거상 차오 집안 사람들이 250여년 동안 거주했다.
산시상인들은 철·면화·소금·밀·쌀·차 등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상품을 주로 다루었다. 이런 물품들이 광대한 중국 땅 안에서, 또 중국을 넘어 티베트와 몽골과 러시아에서 가격이 다르다는 것을 예민하게 포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물건들을 특정한 시기에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면 커다란 이윤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운송하고 판매하는 효율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사용했다.

또 물건들의 이동에서 발생하는 가격의 폭락, 물건의 망실과 훼손, 도적들의 약탈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보험을 만들었다. 당시의 기축통화인 은을 다량 운송하는 데에 따르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수표를 창안하여 산시표호라 부르는 은행사업을 시작했고, 상품의 안전한 운송으로부터 이윤을 창출하는 사업에 눈을 떠서 무력을 갖춘 운송회사인 표국을 만들었다.

평요고성은 명청시대의 건축물들이 가장 잘 남아있는 역사적 도시인 동시에 그 건물들에는 진상들의 이러한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이 건물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이다.

나는 대낮에 한가롭게 이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일승창표호(日昇昌票號)’에 들어가 남북으로 길게 뻗은 건물 내부를 기웃거리며 당시의 금고를 살펴 보았다. ‘화북제일표국(華北第一標局)’에 들어가서는 무예연습장과 당시의 호송대원들이 소지했던 무기들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이 발휘하는 뛰어난 상인기질이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 건물들만큼이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절감했을 때쯤 ‘성황묘(城隍廟)’에 들어가 당시의 진상들이 장삿길의 안전을 빌었듯 내 남은 인생행로가 험악하지 않기를 빌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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