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수학자대회(ICM) 유치위원장인 박형주(44) 고등과학원 교수는 이렇듯 ‘수학’을 인간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학문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힘들게 배웠지만, 평생 한 번이라도 써먹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면서 마치 다른 세계의 학문인 양 취급당하는 학문도 바로 수학이다. 박 교수는 그런 수학과 관련한 세계적 행사인 ICM을 우리나라에 유치하겠다며 두 팔을 걷은 것이다.
#1.“스타를 보여줘야 기초과학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4년마다 세계를 돌며 개최되는 ICM은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 수여식을 겸한다. 그런데 이 필즈상은 노벨상과 큰 차이점이 있다. ‘40세 이하’라는 나이 제한이 그것이다.
“노벨상은 언젠가부터 평생 이룬 업적을 기리는 ‘공로상’ 성격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하지만 필즈상은 매번 젊은 ‘스타’와 ‘영웅’을 탄생시키죠. 그리고 수상자들이 탄생하는 과정은 언제나 드라마틱합니다.”
그렇다면 수학계는 왜 ‘스타’들을 국내에 데려오고 싶어하는 것일까. 박 교수는 2002년 ICM을 유치한 중국의 장쩌민 전 주석을 화두에 올렸다.
“중국에는 20세기 최고 수학자 중 한 명인 ‘S S 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ICM 행사장에서 장쩌민 주석이 그 수학자 앞에선 자리에 앉지도 않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극진한 존경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를 생중계로 지켜 본 중국인들이 과연 기초과학을 홀대할 수 있을까요.”
그는 이러한 중국을 제반 여건이 비슷한 인도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훌륭한 수학적 전통을 배경으로 실제로도 불세출의 수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두 나라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은 물론, 인구가 10억이 넘는다는 사실까지도 비슷하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수학계에서 이뤄낸 두 나라의 성과는 판이하다.
인도가 10여년간 정체의 길을 걸어온 데 반해 중국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바로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나타난 차이라는 것이 박 교수의 주장이다. 또한 그 중심에는 중국의 ICM 개최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인도 역시 2010년 ICM 개최지로 예정돼 있다. 엄청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제자리걸음을 해온 인도 수학계의 ‘진지한 반성’이 빚어낸 결과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세계적인 체육대회와 ICM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를 직접 마주할 기회를 갖는 것이나, 뛰어난 수학자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저는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읽고 물리학과에 진학했었습니다. 물론, 이후 수학에 빠졌지만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수학자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준다면, 이는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겁니다.”
#2.“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입니다.”
ICM 유치추진위원회가 유치하려는 대회는 2014년 대회다. 유치 제안서 제출 마감일이 내년 11월이니까 이제 1년4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뒤늦게 유치경쟁에 뛰어들었지만, 박 교수가 자신감을 가질 근거는 많다.
우선 국제수학연맹(IMU·회원국 68개국)에서 위치가 최근 격상됐다는 점이다. 1981년에 IMU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1993년 2등급(전체 5등급)으로 상향된 뒤 올 들어 4등급으로 한꺼번에 2단계나 격상됐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로, IMU의 10인 집행위원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전체 회원국 우편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았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발표한 SCI급 논문은 지난 10년간 무려 두 배나 늘었는데, 이처럼 가파른 성장을 보인 나라는 중국 외에는 없었습니다. 또한 지난해 스페인에서 열린 ICM에서 김정한, 오용근, 황준묵 세 명의 수학자들이 초청강연자로 나서는 등 세계에서도 한국의 수학을 인정하는 분위기죠.”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강력한 유치 라이벌은 브라질. 경제규모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브라질은 수학논문 수에 있어서도 매년 우리와 엎치락뒤치락해왔던 나라다(2006년 한국 389편, 브라질 340편). IMU에서의 등급 역시 올해 한 단계 상승, 우리와 같은 4등급이다. 캐나다도 2014년 대회 유치전에 뛰어들 태세지만, 이미 두 번이나 개최한 전례가 있어 불리하다는 평가다.
“현재 브라질의 수학 저변은 구 동구권 출신자들이 망명하면서 기여한 바가 큽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자생적으로 이뤄낸 것이죠. 특히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최근 한국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미래세대도 매우 밝은 편입니다.”
2014년 ICM을 유치하려면 내년 11월30일까지 제안서를 내야 한다. 2009년 초에는 유치 후보국가들을 실사하고, 그해 5월 31일 IMU의 11인 집행위원회에서 개최지 후보가 한 곳으로 압축된다. 2010년 8월 IMU 회원국 사무총회에서 최종 결정되는데 이제까지 11인 집행위원회의 결정이 뒤집어진 예는 없다.
박 교수는 “IMU 측에서는 유치경쟁을 위해 150만달러 정도의 예산조달 증빙을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30억원 정도가 들 것으로 예상된다”며 “조만간 정부 측을 대상으로 ICM 유치 예산확보를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유치위원회가 발족식을 가진 순간, 한국 수학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자신의 작은 몸짓이 조만간 거대한 물결로 확산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고 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segye.com
■박형주교수는 | |
1986년 |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학사) |
1995년 | 버클리대 수학과 졸업(이학박사) |
1995년 | 버클리대 전자공학과 박사후과정 |
1995년 | 오클랜드대 수학과 조교수 |
2001년 | 오클랜드대 수학과 부교수 |
2004년 | 고등과학원(KIAS) 계산과학부 교수 |
연구분야 | 계산대수기하학(Computational Algebraic Geometry), 신호처리 및 정보처리 (Signal Processing and Informatics) |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