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작천정 계곡을 굽이굽이 지나 간월사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4.5㎞쯤 차를 몰아가다 보니 모텔 간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열, 열하나, 열둘…스물…. 개수를 세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인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신불산군립공원 기슭에 자리 잡은 간월사지로 올라가는 길도 모텔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폭 3m짜리 도로 양쪽에 모텔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모텔 40개가 병풍림처럼 둘러싼 간월사지는 외딴 섬이었다. 이것으로도 ‘욕망의 배출구’가 부족했나. 새 모텔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69’, ‘몸부림’ …. 신라시대의 흔적을 찾아 자녀와 함께 왔더라면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일부 모텔은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층 주차장으로 차량이 들어서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고, 손님이 2층에 올라가 기계에 현금을 넣으면 원하는 객실 문이 열리는 식이다. 익명 보장이 확실한 탓인지 평일인데도 객실이 이미 찼을 정도로 영업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열섬처럼 고립된 간월사지는 신라 진덕여왕 때 고승 자장(慈藏)이 지은 사찰 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절터에는 1300여년 전 흔적들이 남아 있다. 보물 제370호 석조여래좌상 외에 석탑, 축대가 옛 가람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1984년 발굴을 통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금당 터가 발견됐고 절터(1438㎡)는 울산기념물 제5호로 지정됐다.
안타깝게도 간월사지에서는 ‘과거와 대화’가 아니라 ‘현대의 욕망’만 있을 뿐이다.
간월사지의 비극은 1980년대 온천이 솟으면서 시작됐다. 문화재 보호 목소리는 거세게 몰아닥친 온천 개발 바람 속에 묻혔다. 88년 2월 일대가 ‘등억온천지구’로 지정되면서 간월사지 경계 밖이 구획화되고 상업·숙박시설이 잇따라 들어섰다.
이를 막는 법도 있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문화재보호법상 문화재가 있는 지역에 건물을 지을 때는 ‘현상변경영향검토’를 받도록 돼 있다. 통상 국가지정물은 500m, 지방기념물은 300m 거리를 두고 건물을 지어야 하고 그 범위 안에서도 문화재위원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보물 제370호 석조여래좌상이 발굴된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간월사지 주변은 온천단지로 지정되면서 40개의 러브호텔이 들어섰고, 지금도 모텔 건설이 한창이다. |
전문가들은 서울 경복궁 앞 주상복합빌딩, 경기도 안성향교 앞 아파트 건설 사례 등에서 보듯 전국적으로 문화재 관리가 부실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재청은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올해부터 석조여래좌상을 중심으로 500m 이내 지역을 ▲원형지 보존 지역 ▲최고 높이 12m(2층) 이하 지역 ▲건축법 적용 지역 등 3개 구역으로 나눠 건축을 승인하기로 세부 기준을 마련했다. 이마저도 자극적이고 화려한 간판에 대해서는 권고 규정을 두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간월사지가 이미 관광단지로 지정돼 있어 건축을 막을 순 없겠지만, 추가 시설만은 가급적 절터 앞쪽에 지었으면 좋겠다”며 “간판이 너무 심한 게 많은 만큼 지자체가 의지를 갖고 규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울주군청 관계자는 “모텔 간판이나 건물 색깔은 강제 사항이 아닌, 권고 사항일 뿐”이라며 “심각성을 알지만 강제할 법적 근거가 없어 간판을 정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울주=신진호·조현일 기자 ship6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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