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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초대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최초 여성 수장 정희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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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4-10 17:08:01 수정 : 2012-05-07 22: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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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흔서 나온 유전자 60억 인구서 찾을 만큼 한국기술 우수”
1990년대 초 청소년들이 잇따라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부검해보니 모두 목 안쪽이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죽은 청소년은 전국에서 60명이나 됐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30대 젊은 연구사가 사인 규명에 나섰다. 약학박사인 그는 미국 수준에 버금가는 마약 감정 기법을 개발할 만큼 마약과 독극물 분야에서 출중한 실력을 갖춘 터라 자신감이 넘쳤다. 열쇠는 초록색 물질이었으나 어떤 독극물 혹은 마약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혼신을 다해 실험에 매달려 ‘진해거담제’임을 밝혀냈다. “왜 청소년들이 가래를 제거하는 이 약물을 복용했을까?” 다시 고민에 빠진 그가 추적 끝에 알아낸 사실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프랑스에서 개발한 이 약물이 환각작용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국내 청소년들이 듣고 다량으로 복용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그는 정부에 실상을 전하고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연구사는 다름 아닌 국과수 최초의 여성 수장인 정희선 원장이다.

세계 최초 신개념 동영상 복원 기법, 폐쇄회로(CC)TV에 잡힌 고속운행 차량 번호판 판독 기술, 거짓말 탐지용 의자, 모발 마약감정 시약, 다목적 약독물 검색 프로그램, 거의 100% 맞히는 유전자 분석 방법…. 국과수의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물이다. 상당수는 특허까지 땄다. 의문에 쌓인 수많은 사건·사고의 단서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국과수에는 연간 30만건 정도의 감정의뢰가 들어온다. 이 국과수를 이끌고 있는 정 원장을 5일 만났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 경인고속도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과수의 1층 로비는 과학수사를 다룬 드라마 ‘싸인’에서 봤던 낯익은 장소였다. ‘과학수사의 요람’이라는 큰 글씨를 뒤로하고 2층 원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34년 국과수에 몸담으면서 불태운 그의 열정과 잊지 못할 경험담, 국과수의 갖가지 감정기법 등에 대해 들어봤다.

―1978년 국과수 입사 당시 여성은 드물었을 텐데.

“여성은 결혼하면 대부분 직장을 그만두던 시절이라 면접관이 ‘3년은 근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그 작은 출발로 지금은 미국과 러시아 등 100개국 경찰청 산하 연구기관 관계자와 대학교수 등 독극물 전문가 1700명 정도가 회원으로 있는 국제법독성학회 부회장이고, 차기 회장(임기 2015∼2017년)으로 선출된 상태다. 마약, 독극물 분야에서는 국제적으로 꽤 유명한 위치에 올랐다.(웃음)”

―입사 초기 씨름했던 난제는 무엇이었나.

“현재 국과수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가짜 꿀·참기름을 구분하는 게 어려운 과제였다. 당시 국내에는 마약 사범이 없을 때다. 밤새우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성분 차이를 근거로 진위를 가리는 방법을 개발했다. 1년 뒤 전국에 가짜 꿀을 대량 유통한 사람이 경찰에 적발됐는데, 명쾌하게 구별해줘 입사 2년 만에 표창과 금일봉을 받았다. 가짜 참기름에는 가격이 싼 콩기름이나 목화씨에서 짜낸 면실유, 심지어 인체에 해로운 향료까지 넣는다. 노란색을 칠한 조기, 공업용 색소를 입힌 고추 등 ‘위험한 가짜’를 많이 찾아냈다.”

―마약사범과의 싸움은 언제부터였나.

“1981년과 1984년 두 차례 미국을 방문했는데, 마약복용자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모습을 봤다. 우리나라는 기껏해야 히로뽕의 진위를 파악하는 수준이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도 마약복용 여부 검사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각오로 쥐한테 마약을 주입해 오줌을 받아 어떤 성분이 얼마나 함유됐는지를 검사했다. 그리고 1985년쯤 마약성분 소변 검사방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 시기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히로뽕이 밀수출됐는데 한·일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자 국내에도 소비자가 생겼다. 1986년 가을 이태원에서 경찰에 적발된 마약 복용 용의자는 국과수의 소변검사로 덜미가 잡혔다.”

―소변에서 히로뽕 성분을 검출하는 것이 어려운가.

“히로뽕 성분이 나온다고 모두 범인이 아니다. 누군가 오줌에 히로뽕을 몰래 넣어 누명을 씌울 수 있다. 그래서 히로뽕이 몸에 흡수되면 변환돼 배출되는 대사체를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이것도 한계가 있다. 마약 복용 후 13일이 지나면 소변에서 성분이 검출되지 않는다. 고민이 깊던 차에 미국이 모발에서 마약을 검출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러면 모발 마약 검출 기술은 미국에서 전수받았나.

“아니다. 쥐 털을 가지고 실험을 거듭해 자체 추출법을 개발했다. 히로뽕을 복용하면 머리카락에는 그 성분이 2∼5일 정도 들어간다. 나노g(10억분의 1g)까지도 잡아낸다. 머리카락은 한 달에 1㎝ 정도 자란다. 머리카락 검사로 히로뽕 복용 시기도 알 수 있다. 이런 성과로 국과수가 유엔 마약통제 본부에서 정하는 기준 실험실로 인정받았다.”

―국과수의 마약이나 독극물 관련 기술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미국은 머리카락에 마약가루를 넣고 찧어 만든 모발 마약 감정 시약을 100㎎당 100만원에 판다. 우리는 마약 복용자의 모발을 모아둔 게 많다. 이것을 여러 나라에 보내 실험을 거쳐 평균값을 얻어 시약을 만들었다. 판매할 계획이다. 약물이나 독극물로 사망하면 그게 무엇인지 빨리 알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수만종의 약물이나 독극물 중 자주 검출되는 100가지를 추려 ‘약독물종합정보시스템’을 구축했다. 단 1분이면 그 종류를 특정할 수 있다. 판매를 고려 중인데 독일, 네덜란드 등 타국의 관심이 많다.”

―2011년 1월 오만에서 해적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을 쏜 용의자를 밝혀냈는데.

“해적 아라이는 ‘총을 한 번도 쏘지 않았다’고 했다. 탄환이 발사된 총기를 조사하던 직원이 멜빵을 유전자 검사했다. 땀이나 손 지문이 묻을 수 있어서였다. 해적과 동일한 유전자가 나왔다.”

―국과수의 유전자 분석 기술은 어느 정도인가.

“혈흔이나 지문 등에서 나온 유전자가 60억명 중 누구 것인지 집어낸다. 지구 인구 중에서 1명을 가려낼 수 있는 셈이다. 뼈에서도 유전자를 찾아내는 기술이 있다. 1997년 괌에 대한항공이 추락했을 때 미국과 동등한 실력을 발휘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때는 누가 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탑승자 192명 중 186명의 신원을 밝혀냈다. 작년 뉴질랜드 총리가 지진이 나자 국과수에 사망자 중 동양인을 구분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다.”

―국과수가 자체 개발한 독특한 기술을 소개해 달라.

“훼손된 자동차 블랙박스나 증거인멸을 위해 다른 영상으로 덧씌운 동영상 등을 기존 파일 단위 복원보다 세분화한 프레임 단위로 복원하는 ‘신개념 동영상 복원기법’을 지난해 개발했다. 카드에 형광물질 등을 칠하면 빛의 산란이 다른 점에 착안해 ‘사기도박 카드마크 검출 프로그램 스마트폰 앱’도 만들었다. 수사요원에게 보급해 현장에서 즉각 범행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됐다. 세계 최초의 거짓말 탐지용 의자는 동공이나, 뇌파, 괄약근 등의 변화를 체크해 기존 거짓말탐지기보다 훨씬 정확하게 맞힌다.”

―남편 유영찬씨도 국과수 소장을 지냈는데.

“입사 초기 직속 상관(계장)이었다. 굉장히 꼼꼼하고 정확한 분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눈물이 쏟아질 만큼 혼을 냈다. 여러 실험을 할 때도 방향을 잡아주셨다. 그런 혹독한 훈련과 지도가 지금의 저를 있게 했다.”

―국과수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국과수에는 자연과학, 분자생물학, 화학, 유전자, 컴퓨터공학, 기계물리, 전기, 심리학 등 다양한 전문가가 근무한다. 실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끈기와 집념이 절대 필요하다. 중간에 지치면 안 된다. 끝까지 해결해야 한다.”

대담=박찬준 기자  skyland@segye.com,  사진=이재문 기자

■ 프로필

●충북 충주(57) ●충주여고·숙명여대 약학(학·석·박사)·영국 런던 킹스칼리지 박사 ●11대 국과수 소장 ●국과수 초대 원장 ●국제법독성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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