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동래정씨에서는 정회문 이후 세계(世系) 일부가 실전되었기에, 고려 초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조로 한다. 정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을 지냈고, 정문도의 아들 정목(鄭穆)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으며, 정목의 아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은 동지공거·한림학사를 지냈다. 또한 그의 아들 정서(鄭敍)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동래정씨의 분파는 정지원의 6세손인 정보(鄭輔)를 파조로 하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와 정필(鄭弼)을 파조로 하는 첨사공파(詹事公派)로 대별된다. 이들 2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였다.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대호군공파는 조선 중기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직제학공파의 파조 정사(鄭賜)는 조선 세종 때 예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아들 5명과 손자 10명을 두었다. 그 가운데 셋째 아들 정난종(鄭蘭宗)은 동래정씨가 조선에서 명문가 반열에 오르도록 한 중흥조라 할 수 있다. 그는 세조에서 성종 대에 걸쳐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냈다.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정광필(鄭光弼)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동래정씨는 정씨 집안 중에서 가장 큰 문벌을 형성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손인 전주이씨(22명), 세도정치를 펼친 안동김씨(19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정승(17명)을 배출하였다. 그 외에도 대제학 12명, 호당 10명, 공신 6명, 판서 20명에 문과급제자만 198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꼽힌다.
주요 인물로는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좌익·익대·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이 있으며, 영의정을 지내고 기묘사화 때 신진사류를 구하는 데 힘쓴 정광필, 선조 때 만민평등의 대동세상을 추구한 혁명가 정여립,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존겸(鄭存謙), 일제강점기 때 국학자였던 정인보(鄭寅普) 등이 있다. 동래정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3만7524가구에 44만23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전체 정씨 인구의 22%를 차지하는 것이다.
부산 화지산에 있는 동래정씨 2세조 정문도의 묘역에서 동래정씨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문도 묘는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
동래정씨의 시조 정회문은 신라를 건국한 6부족 중 취산의 진지촌장(珍支村長·본피부)이었던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초에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기록하고 있다. 정지원의 아들인 정문도 역시 안일호장을 지냈다.
지금도 정문도의 묘가 부산의 화지산에 있다. 그의 묘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대표적인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의 묫자리에 얽힌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그가 죽어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묘를 파헤쳐 버려,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묻고 파헤치는 실랑이가 계속되자 아들이 마을 노인을 찾아가 사실을 얘기하자, 노인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 수 없으니 관을 보릿짚으로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그의 아들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도깨비들이 나타나 “주인이 들어왔구나”라고 하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긴 동래정씨가 조선시대 400여 년 동안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지원의 아들 정목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정목의 아들 4형제 중 셋째인 정택(鄭澤)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또 막내 아들인 정항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주사(知奏事)를 역임한 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정항의 아들 정서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작자로 유명한데, 그는 인종의 동서이다.
동래정씨의 분파는 교서랑공파와 첨사공파로 대별된다. 교서랑공파는 다시 전서공파(典書公派)·설학재공파(雪壑齋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평리공파(評理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로 나누어지고, 첨사공파는 다시 윤창파(允昌派)·호군공파(護軍公派)·수찬공파(修撰公派)·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참봉공파(參奉公派)·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나누어진다. 교서랑공파 파조인 정보의 5세손 정양생(鄭良生)은 공신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정구(鄭矩)는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개국 후인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공조판서·호조판서·개성류후(開城留後) 등을 역임하고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그는 글씨를 잘 썼다. 그가 쓴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이 남아있다. 정양생의 셋째 아들이 정부(鄭符)이다. 그의 집안은 아들 정흠지(鄭欽之)와 손자 정갑손(鄭甲孫)·정창손의 의해 크게 이름을 날렸다. 정흠지는 태종 11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정갑손은 세종 때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동생 정창손은 세조의 집권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와 성종 대에서 대사헌·대제학·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2등이 되어 봉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후 대사성·대제학 등을 겸직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 후 익대 공신 3등에 오르고,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고, 좌리공신 2등이 되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했다. 정창손의 아들 정괄은 좌의정에 올랐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조선 전기 동래정씨의 가세는 정난종과 그의 아들 정광필에 의해 더욱 굳어졌다. 정난종은 세조 2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때는 좌리공신 4등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호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했으며, ‘원각사비(圓覺寺碑)’와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 등을 썼다. 정광필은 성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과 이조참의를 역임했으나, 갑자사화로 인해 아산으로 귀양갔다.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복직되고, 그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또다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을 두둔하며 희생을 막으려 했으나 다시 파면되었다. 그 후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풀려나와 영의정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죽은 뒤 중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익공(文翼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정광필 이후 그의 후손들은 더욱 번창했다. 손자 정유길(鄭惟吉, 대제학·좌의정)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정유길의 외아들 정창연(鄭昌衍)이 좌의정을, 큰손자 정광성(鄭廣成)이 형조판서를, 작은손자 정광경(鄭廣敬)이 이조판서를 지냈다. 증손대에서는 정광성의 아들 정치화(鄭致和)가 좌의정을, 정광경의 아들 정지화(鄭知和)는 좌의정을 지내 동래정씨 집안에서 삼정승(三政丞)이 나오기도 했다. 그 다음 대에서는 정태화(鄭太和)의 아들 정재숭(鄭載嵩)이 우의정을, 정지화의 아들 정재희(鄭載禧)가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 외에도 6대손인 정석오(鄭錫五)가 좌의정을, 정형익(鄭亨益)은 예조판서를 역임했으며, 7대손에서는 정홍순(鄭弘淳)이 우의정을, 정상순(鄭尙淳)은 이조판서를, 정경순(鄭景淳)은 형조판서, 정일상(鄭一祥)은 호조판서를 역임했다.
8대손에서는 정존겸(鄭存謙)이 영의정을 지냈고, 정존중(鄭存中)은 공조판서를 지냈다. 9대손에서는 정원용(鄭元容)이 영의정을, 정시용(鄭始容)이 형조판서를, 정헌용(鄭憲容)이 공조판서를, 정대용(鄭大容)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0대손에서는 정기회(鄭基會)가 이조판서를, 정기세(鄭基世)는 이조판서를, 정기선(鄭基善)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11대손에서는 정범조(鄭範朝)가 좌의정을, 정건조(鄭健朝)는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정유길의 집안은 12대에 걸쳐 정승과 판서를 고루 지냈다.
①②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정난정의 고택과 묘. 정난정은 동래정씨 중흥조로 일컬어진다. 최근엔 후손들이 시가 80억원에 달하는 고택 등을 사회에 기증해 화제를 낳았다. ③ 정여립이 아들 정옥남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 전북 진안군 죽도. ④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의 전말이 수록된 기축록. 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민족혼을 일깨우려 애썼다. |
하지만 조선조에서 동래정씨가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가문이 된서리를 맞아 몰락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익산군수였던 정희증(鄭希曾)의 아들인 정여립은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하지만, 예조좌랑과 수찬이 된 뒤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편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그는 서인의 미움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관직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동인에서는 영향력이 높았다.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지함두(池涵斗)·승려 의연(義衍) 등이 가담하였다. 하지만,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등이 모반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다. 그는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였다. 이로 인해 처형된 동인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은 서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설도 없지 않다. 서인들이 동인을 모함하기 위해 모반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며, 그가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따라 들어와 살해한 뒤 ‘자살’로 꾸몄다는 것이다. 서인의 영수였던 송강 정철이 옥사처리를 담당했고, 그의 참모로 송익필(宋翼弼)이라는 노비 출신이 활약했다. 송익필은 자신과 가족을 면천(70명)시키고, 이발·백유양(白惟讓)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여립은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이야기했다. 즉, 천하는 공물로 주인이 따로 없다는 것이며,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왕조시대에 상상할 수도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동래정씨 근현대 인물로는 위당 정인보를 들 수 있다. 정인보는 망한 나라의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주로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국학과 동양학을 강의하는 한편, ‘시대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중에게 국혼을 환기시켰다.
광복 후 국학대학장에 취임했으며, 1951년에는 초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담원문존(?園文存)’ ‘월남이상재선생전(月南李商在先生傳)’ ‘조선문학원류고(朝鮮文學源流考)’ ‘담원시조집’ ‘담원국학산고(?園國學散藁)’ 등이 있다.
그 외 현대 인물로는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자 통일부 장관으로 17대 대통령 후보를 지낸 정동영(鄭東泳)씨가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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