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본명 김창수·1876∼1949)의 애국적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자신이 걸어온 조국독립의 길을 두 아들에게 유서 형식으로 남긴 핍진한 육필이기에 감흥을 일으킨다. 김구 선생은 1928년 3월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일지에 있듯 백범이 농민군 활동, 의병 투쟁, 계몽운동 등을 거쳐 항일 독립운동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해서였다. 30년 가까이 임정에서 활동하며 주석까지 올랐다.
하지만 권한을 향유하는 직책이 아닌 형극의 일상이었다. 중국 대륙 프랑스조계에 위치한 상하이 임정을 시작으로 충칭 청사에서 귀국하기까지 유랑의 길을 걸은 것이다. 임정은 단순한 망명정부가 아닌 해외 독립운동의 통합 전초기지였기에 간난신고를 겪었다. 그러나 한민족의 의기는 잃지 않았다. 백범이 1932년 1월과 4월에 주도한 의열투쟁인 이봉창의 도쿄 의거와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을 정도다.
깊은 상처 속에서도 백범의 꿈은 평화였다. 그는 ‘나의 소원’을 토로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 /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1947년 샛문 밖에서’ 쓴 글이다. 일제의 침탈로부터 막 벗어난 직후의 국가관이다. 깊다. 성직자의 기도에 가까운 평화사상이다. 오늘은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지 꼭 60주기가 되는 날이다. “마음속에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며 통일조국을 꿈꿨던 백범이다. 그는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를 가리면서 길을 걸었던 선각자였다. 아! 백범의 애국애족 정신이 더욱 그립다.
황종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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