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를 한 후에는 잊어야” “11층 건물 전체가 하나의 ‘꿀벌 집’ 같습니다. 각 방에는 미래에 국민이 먹을 꿀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봤습니다. 교수, 학생 모두가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미래 국가를 먹여 살릴 기술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자신의 이름이 붙은 ‘정문술빌딩’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남긴 말이다.
정 전 회장은 벤처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1983년에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미래산업을 창업해 반도체 검사 장비를 국산화했고, 1990년대 말에 코스닥과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꽃을 피웠다. 특히 그는 항상 ‘거꾸로 경영’을 실천했다. 투명경영, 기술중심경영, 친인척 배제 등의 남다른 방식으로 화제를 모았다.
2001년 회사 경영권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직원에게 물려주며 은퇴를 선언했다. 아울러 재산의 사회 환원을 선언했다. 몇 달 후에 KAIST를 방문해 300억원을 기증했다. 그후에 그는 발길을 끊었다. 학교에서 임의로 그의 이름을 붙인 건물의 기공식과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세 가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첫째, 이 돈으로 미래 국민을 먹여 살릴 정보·바이오 융합기술을 개발하고 인재를 길러달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융합 학과를 설립하고 학사, 석사, 박사 인력을 양성해줄 것을 요청했다. 둘째로는 이 돈으로 모방하지 말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연구를 해야 새로운 기술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이 세상에서 남이 하는 것을 비슷하게 해 세계를 바꾼 예가 없다. 획기적인 것은 새로운 것에서 나오니 항상 도전해 달라”고 주문했다. 셋째로는 이 돈으로 화합을 추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돈을 골고루 나누어 사용하면 화합에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결과물은 없다. 반드시 선택과 집중을 해 투자해야 한다. 불만이 내게 전해오면 돈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알겠다. 그러나 불만이 없으면 잘못되고 있다고 알겠다”고 말했다.
정 전 회장은 건물 기공식과 준공식 외에도 KAIST에 올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이 건물을 방문하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 간곡하게 청하자, 그는 “나중에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기술이 나오면 그때 가서 보자”고 말했다.
드디어 지난 19일 그가 이 건물을 방문했다. 기증 후 8년 만의 일이다. 그 건물 속에서 기대하던 기술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기술 중에서 원적외선 영상기법을 이용해 혈관 속의 피의 흐름을 관찰하는 기술이 개발됐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당뇨병을 조기에 발견해 한결 치료가 쉬워진다. 이미 상업화에 성공해 내년이면 병원에 판매될 예정이다. 그동안의 경과보고도 있었다. 바이오 및 뇌공학과가 새로이 만들어지고 약 200명의 인재가 배출됐으며, 현재 200명이 공부하고 있다. 연구실 방문도 있었다. 이때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실험을 직접 설명했다. 그는 인사말에서 KAIST에 돈을 기부한 이유를 밝혔다. “나는 한국의 연고주의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학연, 혈연, 지연의 고리를 끊어야 새로운 인력이 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부터 솔선수범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연고가 없는 KAIST에 기증하고,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부철학도 밝혔다. “탈무드에 기부에 관한 말이 있습니다. 기부를 할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기부를 한 후에는 잊으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이처럼 잊지 못하고 여기에 왔습니다. 아마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기술이 나왔다기에 이를 보고 싶은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는 건물을 떠나면서 방문 소감을 남겼다. “나의 적은 돈으로 이렇게 우수 인력을 모으고 길러 주셔서 학교 측에 감사합니다. 특히 아내가 돈을 보람 있게 쓴 것 같다고 하니 더욱 기쁩니다. 이 꿀벌 집을 더욱 알차게 가꾸어 국민이 편안히 먹고살게 해주세요.”
KAIST 바이오뇌공학과 미래산업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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