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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청력은 잃었지만…가슴으로 듣고 빚는 ‘북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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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4-18 22:54:54 수정 : 2010-04-18 22: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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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만들기 40여년 외길 임선빈 악기장 장인이 북을 슬며시 두드린다. “둥둥, 덩덩…”

북은 소리를 지어낸다. 장인의 손길에 따라 북소리는 커졌다 작아지고, 때로 심장의 힘찬 박동을 연상시키며 작업장 안에 퍼졌다. 장인은 마지막으로 소리를 조정해 북 제작을 끝내려는 참이다. 작업의 성공 여부를 결정 짓는 마지막 순간. 모두에게 들리는 북소리를 장인만은 듣지 못한다. 장인은 35년 전 청력을 거의 잃었다.

“북이 만드는 소리의 울림을 손으로 느껴 음을 조정합니다. 북 한쪽 면에 댄 손끝으로 떨림이 전해지면 제대로 소리가 나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임선빈(61·경기무형문화제 제30호) 악기장이 북을 만드는 방식이다. 그는 “원하는 소리의 99%는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고단하기만 했던 삶을 극복하고 이른 장인의 도저한 자부심이다.

◇‘북의 장인’ 임선빈 악기장(경기무형문화제 제30호)은 35년 전 청력을 거의 잃었다. 하지만, 늙은 장인의 서슬퍼런 고집 덕택에 북이 만드는 울림만으로도 미세한 소리를 느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종덕 기자
#스승과 만남으로 시작된 북과의 인연


어린 시절 임 악기장은 서울 서부이촌동 일대에서 쓰레기를 뒤져 깡통과 연탄재 등을 모으고, 구걸을 하며 넝마주이 생활을 했다. 연이은 사업 실패를 겪은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자 입 하나라도 덜겠다며 어머니가 그를 넝마주이들이 모여 있던 이른바 ‘재건대’에 집어넣은 것이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그에게 쓰레기를 뒤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구걸을 제대로 못하면 심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오른쪽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것도 이 시절의 심한 매질 때문이었다. 견디다 못해 친구 4명과 용산에서 무작정 기차를 타고 탈출을 감행했고, 배가 고파 무작정 내린 곳이 전라도 순천이었다. 친구들과 밥을 얻어먹겠다고 간 장터에서 스승 고 황용옥 선생을 만났다. 11살 때였다.

“선생님이 국밥을 한 그릇 먹여주고, 옷도 사주더라구요. 그리고는 앞으로도 재워주고 먹여줄 테니 함께 가자고 하길래 무작정 나섰죠. 대구에 있던 선생님 작업장에서 처음 3개월 정도 잔심부름이나 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치는 북소리를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배워보라고 권유하시더군요.”

북통을 짜는 것에서부터 스승의 세심한 지도가 시작됐다. 북을 만들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1년 정도를 배우고 나니 웬만한 북은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대신 상체의 힘이 좋은 것이 북 제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18살 때 첫 고비를 맞았다. 스승인 황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황 선생은 그에게 단지 북 만드는 것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한번 잃어버린 정신은 다시 찾지 못한다’, ‘자만하지 말고 배움에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지금까지 북을 만들며 지켜온 삶의 좌표를 제시한 것이다. 황 선생의 죽음은 아버지를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북을 만드는 것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지만 충격이 너무나 컸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세속을 떠나 출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천상 북을 만들 팔자였나 보다. 절을 찾았다가 문양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걸 꼭 북통에 새겨보고 싶었다. 결국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손에 이끌려 북을 만들기 시작한 그가 온전히 ‘북장이’가 된 것이다.

#상실된 청력…손으로 듣는 북소리

청력이 살아 있던 왼쪽 귀는 북 제작을 하면서 서서히 나빠져 갔다. 항상 한쪽 귀로 소리를 확인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25살 무렵부터 보청기를 끼기 시작했다. 북 만드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던 그로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못하는 술, 담배까지 하게 됐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걸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세심하게 소리를 확인할 수 없으니 모든 게 끝났다 싶었죠.”

그러나 그는 반 년여 방황을 끝내고, 손끝으로 음을 구분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끼면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음을 조정할 때에는 빼버린다.

“보청기를 통해 듣는 소리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북소리 외 다른 소리가 끼어드는 걸 막으려면 보청기를 빼는 게 오히려 좋지요.”

11살 이후로 내내 북을 만들며 손끝에 새겨진 소리의 감각이 그를 진정한 장인으로 만들었다.

#평생 이어진 삶의 고단함도 꺾지 못하는 장인의 고집

임 악기장의 과거와 현재는 우리가 이 땅의 장인을 얼마나 홀대하는지를 보여준다. 북 만드는 것을 배우며 그는 항상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았다. 특히 가죽을 얻기 위해 소를 직접 잡아서인지 더욱 그랬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그가 북을 대하는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큰 북을 만들 때면 항상 목욕재계, 머리를 깎아 심신을 경건히 한다. 지금은 대부분 기계로 북을 만들지만 그는 손작업을 고수한다.

“기계로 하면 편하죠. 하지만 어느 부위의 가죽을 북에 쓰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집니다. 또 가죽을 얼마나 당길지를 두고 세심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기계가 이런 걸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명성이 높아지면서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쓰인 북과 청와대 춘추관 북, 통일전망대 북 등을 만드는 데 참여했고, 높이가 2m가 넘는 안양 시민의 북을 제작했다. 1999년 10월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예도 따라왔다.

명장의 반열에 올랐으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매달 100만원이 나오지만, 1년에 두 번 해야 하는 전시회를 준비하기가 벅차다. 북 주문이 많아서가 아니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이곳저곳 일을 다녀야 한다. 이런 생활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북 만들기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들 동국씨가 아버지를 돕고 있다.

공들여 만든 북을 둘 곳이 없어 전시회가 끝나면 분해해 버려야 할 때 ‘자식을 보내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북을 달라고 하면 그냥 주겠는데 그런 곳도 없고, 좁은 내 집에 둘 만한 것도 아니고…. 어쩌겠습니까, 해체해야죠.”

북을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참아내야 한 차별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그를 지치게 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북에 대한 그의 고집은 북 가죽처럼 질기기만 하다.

“북은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내야 합니다. 조용한 산속에서 듣고 있으면 옛날의 못먹고 못살았던 때의 서러움,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에 대한 깊은 회한이 씻기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만든 북이 내는 소리는 그렇게 살아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는 북을 만들 순 없죠.”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한 길을 걷는 늙은 장인의 삶이 깊은 공명을 울렸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임선빈은 누구…

1949년 충북 청주에서 다리에 소아마비를 안고 태어났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서울로 상경해 넝마주이 생활을 하던 중 심한 매질로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11살 때 고 황용옥 선생을 만나 북과 인연을 맺었다.

25살 무렵에는 왼쪽 청력도 대부분 상실해 보청기 없이는 대화조차 불가능하게 됐다. 1999년 10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됐다. 서울올림픽 개막식 북, 청와대 춘추관 북, 통일전망대 북 등의 제작에 참여했고, 안양 시민의 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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