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화약을 개발한 지 약 600년 후인 고려 말에 무기발명가이자 장군인 최무선은 1375년 화약 제조에 성공하고,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해 국내 총포 제작의 신기원을 이뤘다.
이 무렵 화약을 이용해 청동이나 철로 된 통 속에 화살이나 탄환을 넣어 발사하는 무기인 총통이 등장한다.
총통은 보통 땅에 거치한 상태에서 사격하는데 그런 점에서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세총통’(細銃筒)은 오늘날의 권총에 해당하는 휴대용 화기로 우리나라 소화기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길이가 14㎝에 구경이 9㎜로 화약의 힘으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한 병사가 손으로 화약을 사용, 금속 총열에서 탄환을 표적에 날려보내 적을 살상시킬 수 있는 장치를 소총이라고 정의할 때 조선 선조 때 개발된 ‘승자총통’(勝字銃筒)이 우리나라 소총 개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승자총통은 전라좌수사였던 김지에 의해 선조 10년(1577년) 이전에 개발됐다. 구경 2.7㎝, 길이 58㎝, 무게 4.5㎏의 소형 총통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져 화살이나 철환을 발사했다.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575년이며, 문헌에는 1583년에 처음 등장한다. 성능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선조 16년(1583년) 신립 장군에 의해 실전에서 우수성이 입증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소총 개발의 시초로 불리는 조선시대 승자총통과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아래 사진). 국방과학연구소 제공 |
이러한 총통을 가진 조선군이 임진왜란 때 왜 일본군에 패했을까.
세계적인 소총 발전 단계에서 보면 일본군의 ‘조총’(鳥銃)은 캐넌 록식 승자총통의 다음 세대인 ‘매치 록’(Match-Lock)식에 해당되는, 당시로서는 최신 화기였다. 일본 내 전쟁을 통해 개량과 발전이 이뤄진 상태에서 이미 대량생산 단계에 있었다.
조총은 발사 속도가 2분에 1발 정도로 다소 느렸지만 승자총통과 달리 조준 직사 사격이 가능했으며,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거리가 약 200m에 달할 정도로 살상력과 명중률이 높았다. 조총과 승자총통 대결의 결과는 자명했다.
선조 22년(1589년) 황윤길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대마도주가 선물한 조총 몇 자루가 국내에 처음 전래됐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조총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임란 초기에 일본군 조총의 쓴맛을 봐야 했다.
이후 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조총 모방개발에 성공했고 제조 기술이 전파되면서 한때 조총 생산량은 연간 3400여정에 달했다.
조총 개량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차륜식 방아틀총(Wheel-lock), 수석총(燧石銃·Flint-lock) 등이 개발됐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거리가 약 1000보 되는 ‘천보총’이 개발돼 영조 원년(1737년)부터 성을 지키는 화기로 운용되기도 했다.
박병진 기자, 공동기획 국방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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