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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8> 쓰레기가 되는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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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4-24 17:37:37 수정 : 2011-04-24 17: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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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는 창조의 산파이자 장애물이라는 양면성 가져
2011년 3월 초순, 일본 동북부 지역을 휩쓴 대지진 현장을 보여주는 동영상에서 나를 가장 경악시킨 것은 거대한 해일이다. 집과 건물들, 생활 집기들, 자동차와 선박들, 각종 시설물들, 건축자재들을 해일이 집어삼키고 내륙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걸 보는데, 정말 두렵고 끔찍했다. “네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의식의 안쪽을 찌르는 ‘태어남의 불편’과 동시에 나는 세계의 종말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저럴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거대 해일은 한순간에 살림의 터전을 초토화하고 쓰레기 더미로 만들었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고 나약하다. 우리가 감추고 있던 것들, 어떤 방어막에 가려진 것들,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던 삶의 실체와 비밀들을 그것은 만천하에 까발려 드러낸다. 그 잔해물의 일부가 바다로 흘러드는데, 여기에는 20만여 채나 되는 파괴된 건축물들과 실종자 1만4000명의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해류를 타고 하루에 16㎞씩 태평양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돌이키기조차 괴롭고 끔찍한 것은 그 규모가 아니다. 그토록 꼭꼭 숨기려는 비밀의 가차 없는 폭로라니! 즉 사람이 쓰레기의 지속적인 생산자이자, 사람이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저 공공연한 비밀 말이다.

현대적 생활방식이 낳은 최대의 과제는 썩지 않고 분해되지 않은 채 산처럼 쌓이는 쓰레기 더미다. 임의적이고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지구화의 힘들, 질서 구축과 경제적 진보에서 따돌림당한 채 그 부작용으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양산된다. 육지에서 흘러들고 배에서 투척된 쓰레기들에서 플라스틱은 파도에 으깨지고 자외선에 노출되어 잘게 분해되어 거대한 섬을 이루고 바다 위를 부유한다. 해양학자의 보고에 따르면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이 플라스틱 쓰레기 섬들은 그 지름이 수백㎞에 이르고 남한 땅의 14배가 넘는 규모라고 한다. 가히 지구의 제7대륙이라고 할 만하다. 쌀알처럼 잘게 쪼개진 플라스틱 잔해물을 바닷새나 물고기들이 삼키면 거기에 함유된 유해물질들이 바닷새나 물고기들의 몸속에 축적된다. 먹이사슬의 위계에서 이것을 상위 동물들이 먹고 다시 최상위에 있는 사람들이 먹으면 생물농축(Biomagnification)의 악순환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쓰레기야말로 현대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모든 유용한 생산이 있는 곳에서는 쓰레기가 나온다. 현대의 생산 활동과 쓰레기 생산은 연동되어 있다. 따라서 쓰레기를 얼마나 잘 처리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현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얼마나 쾌적해지느냐와 직결된다.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쓰레기는 모든 생산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이다. 아마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산업계의 우두머리들은 쓰레기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하며, 강한 압력을 가해야만 그것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설계도에 따른 삶에서는 과잉이라는 전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생산 활동을 자극하고 격려하고 유발하는 전략 또한 쓰레기 생산을 자극하기 때문에 쓰레기 은폐는 매우 어렵게 된다. 쓰레기는 그 엄청난 양 때문에 감추거나 은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쓰레기 처리 산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현대적 생산의 한 부분(다른 수단에 의한 은폐 정책으로서, 이후의 억눌린 것의 복귀를 막는 것이 목표인 보안[안전] 서비스 산업과 더불어)인 것이다. 현대적 생존 ― 현대적 생활방식의 생존 ― 은 얼마나 솜씨 좋고 능숙하게 쓰레기를 치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어떤 대상도 그것의 내재적 특성 때문에 쓰레기가 되지는 않는다. 물건들은 추하고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장으로 향하기 때문에 추하고 쓸모가 없는 것이다. 쓰레기는 대상에게 가해지는 외부의 분리와 변성 작용의 결과물이다.

“형태 없는 원석 덩어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완벽한 형상에 대한 전망이 그것의 탄생 행위에 선행한다. 쓰레기는 그러한 형상을 숨기고 있는 포장이다. 그러한 형상을 드러내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하고 진정한 조화와 아름다움 속에서 완성된 형태를 감상하려면 먼저 형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풀어야 한다. 어떤 것이 창조되려면 다른 어떤 것이 쓰레기가 되어야 한다.”(바우만, 앞의 책)

이렇듯 쓰레기는 생산과 창조에 따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이발소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다듬을 때 잘려 나간 것들은 쓰레기로 처리된다. 멋과 품위를 위한 설계와 분리 조작으로 잘린 머리카락 때문에 우리는 보다 참신하고 단정한 용모를, 전과 달라진 멋진 맵시를 얻지만, 신체의 일부일 때 소중한 것으로 간주되던 그것은 잘리자마자 오염 물질이라는 지위로 격하된다. 그러나 쓰레기는 항상적으로 나쁘기만 한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 좋은 것, 우월한 것을 추출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모든 쓰레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을 추출하는 경이로운 행위의 도구”(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가 되는 것이다. 쓰레기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 양면성 때문에 쓰레기는 숭고하다. 창조의 산파이며 동시에 장애물이 되는 내재적 모호함, 그리고 매혹과 혐오라는 양가감정의 경계에서 쓰레기는 숭고해진다.

버려져도 괜찮은 모든 것들, 예컨대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 같은 것이 쓰레기다. 쓰레기란 항상 잉여에서 태어난다. 사이버 공간에는 과잉의 정보들이 넘친다. 이것들은 인간 두뇌나 그 어디에도 저장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피상적으로 훑어보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무한하다. 그 어디에도 흡수되지 않은 채 사이버 공간에서 뜻없이 떠도는 과잉의 정보들은 월드와이드웹을 “무한히 넓고 기하급수적으로 확장 중인 정보-쓰레기통”(바우만, 앞의 책)으로 만든다.

이것들은 바다 위에 떠도는 쓰레기 섬과 대칭을 이룬다. 뿐만 아니다.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 자신을 부양할 수가 없어서 국가의 생계 보조 공여 수단(실업 수당, 보조금들, 작종 수당들)에 의지하는 ‘잉여’의 존재들 역시 쓰레기로 분류된다. “설계가 있는 곳에 쓰레기도 있다.”(바우만, 앞의책) 혼돈과 무질서와 무법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설계 과정에서 철저하게 버려지고 배제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질서 구축의 장애물이고 혼돈을 불러오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혼돈은 질서의 분신이며, 마이너스 기호가 붙은 질서이다. 즉 어떤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않은 상태이다.”(바우만, 앞의 책) 아울러 모든 주권에서 배제되는 순간 인간은 쓰레기로 전락한다. “설계된 형태에 맞지 않거나 앞으로 맞지 않게 될 일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또는 설계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그로 인해 투명성을 흐리게 할 사람들.”(바우만, 앞의 책) 카프카가 그린 괴물과 돌연변이들, 그리고 집 없이 떠도는 부랑자들, 괴짜, 잠재적 범죄자들.

국가와 법이 우리를 지켜줄까? 그 믿음은 어리석다. 인종 청소란 쓰레기들을 치우는 게 아니다. 인종 청소의 본질은 질서 구축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무고한 생명들을 배제하려고 벌이는 무차별한 살상이다. 그것은 온갖 대의로 치장되지만 중대한 범죄다. 일반적으로 국가와 법은 규율을 위반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폭력들을 합법화하고 당위들로 포장한다.

“법은 자신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며,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문지기에 의해 지켜지고 있으며, 문은 열려 있지만 무엇엔가도 열려 있지 않다.”(데리다, ‘선입견’)

법은 설계이고, 설계에 작용하는 권력이다. 법이 “예외화에 따른 포함적 배제를 통해 자기 내부로 포획해 들일 수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아감벤의 통찰은 얼마나 명쾌한가! 법은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 곳에서 생겨나고, 제 규범의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감으로써 효력을 만든다. 저 수많은 예외 조항들! 법은 그 많은 예외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을 법으로 지탱할 수 있다.

동일본 지진과 해일로 최악의 원전 사고가 터지고, 후쿠시마 원전을 중심으로 반경 20㎞ 안쪽은 강제피난구역으로 정해졌다. 사람들은 평상시 방사능 수치보다 500배가 넘는 그 땅을 떠나 흩어졌다. 체르노빌에서 그랬듯이 방사능에 오염된 모든 건물과 물건들은 쓰레기가 되었다. 그 반경 안은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된다. 아울러 “쓰레기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괴로운 문제인 동시에 가장 철저하게 지켜지는 비밀”(바우만, 앞의 책)이라는 사실도 바뀌지 않는다.

동일본 지진과 해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수적 희생자들일 뿐이지 인간 쓰레기가 아니다.

희생자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기다리는 일이다. “기다리는 것은 수치이며, 기다리는 것의 수치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되돌아온다”(바우만, 앞의 책) 할지라도. 다른 선택이 없다. 기대와 불확실성 사이에서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면서 ‘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모는 모든 악덕들, 즉 자본과 자원의 독점, 집단의 광기, 유전자 변형, 불공정 무역 등에 저항하며, 걸고 볼품 있는 삶을 만들려고 애써야 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조르조 아감벤, ‘예외상태’ , 김항 옮김, 새물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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