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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네 산책] 노혁명가의 조국애

입력 : 2011-10-28 17:47:56 수정 : 2011-10-28 17: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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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흔히 자기 작품을 졸작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우당 이회영 선생의 고귀한 정신을 재현한 소설 ‘백 년 동안의 침묵’을 필자는 함부로 졸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회영 선생은 한국의 보물급 정신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박정선 ‘백년 동안의 침묵’의 저자
생각해보자. 망한 나라 조선의 그 누구가 당시 중국의 실력자 원세개를 설득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짓고 한인촌을 건설할 땅을 살 수 있었을까. 전무후무한 명문거족,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1556∼1618)부터 내리 10대까지 영의정을 배출한 명문가가 아니고서는…. 그러나 우리가 우당 선생을 기억해야 할 것은 명문거족이란 게 아니다. 아흔아홉 칸 집을 버리고, 명동 노른자위 6000평 저택 등 모든 것을 버리고, 9개월 된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종복들 13명을 합해 6형제 가족 60여 명이 열두 대 삼두마차를 몰면서 영하 40도 만주벌판의 살인추위를 뚫고 군사기지를 세우러 서간도로 달려갔다는 데 있다. 

또 하나는 아내에게 자신의 이름을 갈라내어 ‘영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나, 석파 난을 치고 퉁소를 연주하며, 하루에 30∼40명씩 들이닥친 항일투사들을 먹이고 재운 선생의 진면목은 인간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한 따뜻함이었다. 선생의 그것은 모든 것을 이뤄내는 단초가 되었다.

조국 해방이 묘연해질수록 더욱 불타올랐던 60대 노혁명가의 조국애와 신념,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선생의 발자취를 묘사하면서 작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집필 도중 세 번이나 울었다. 그것도 크게 소리 내어…. 이제 한일 병합의 아픈 역사는 백년 전 일이 되었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당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제목도 ‘백 년 동안의 침묵’으로 붙였다. 선생의 발자취가 인구에 회자되어야 마땅함에도 꼭꼭 숨어 있었지만 이젠 길고 긴 침묵을 우리가 가차 없이 깨자는 역설이기도 하다. ‘애국’이란 말 자체를 촌스럽게 여기는 이 시대에 선생의 한 마디로 모두 화들짝 깨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선생은 한국의 미래와 후손을 위해 산화했기 때문이다.

박정선 ‘백년 동안의 침묵’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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