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엄중처벌” 밝혀… 시위 강경대응 선회 명분 얻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무효 촉구 집회 현장을 관리하던 경찰서장이 시위대에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찰의 향후 집회관리 방침이 다시 강경대응 쪽으로 선회하게 됐다.
이강덕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불법 집회·시위 주도자와 폭행 가담자는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주최측 만나려다… 박건찬 서울 종로경찰서장(붉은색 원)이 26일 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무효화 요구 집회 과정에서 시위 대열 앞에 있던 야5당 대표와 면담을 하기 위해 가려다(왼쪽) 시위대에 둘러싸여 폭행을 당하고 있다. 연합뉴스 |
27일 경찰에 따르면 박건찬 종로경찰서장은 전날 오후 9시35분쯤 야5당과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등 주최로 정당연설회가 진행 중이던 광화문광장에서 준법집회 진행에 대한 협조를 구하기 위해 주최 측 단상으로 향했다. 당시 광장에 마련된 단상에서는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연설하던 중이었다.
이때 회색 근무복 점퍼 차림을 한 박 서장을 발견한 시위대가 그를 에워싸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집회 참가자 일부가 “폭력 쓰지 마세요”라고 말렸지만, 박 서장은 입 주변을 얻어맞아 윗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이 과정에서 박 서장의 안경과 모자가 벗겨지고, 견장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를 조현오 경찰청장으로 오인한 일부 시위대는 “조현오다”, “끌어내라”고 외치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10분가량 이어진 몸싸움에서 빠져나온 박 서장 일행은 세종로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인근 파출소로 몸을 피했다. 박 서장은 머리와 왼쪽 어깨 부분을 다쳐 전치 3주의 진단을 받았다.
이강덕 서울지방경찰청장이 27일 오후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 청장은 향후 불법, 폭력시위 가담자뿐 아니라 주최 측도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
경찰은 즉각 엄중 처벌 방침을 밝혔다. 추운 날씨에 사람을 향해 물대포를 쏘는 것에 대한 인권침해 지적이 잇따르며 한발 물러섰던 경찰의 집회관리 기조도 다시 강경해졌다. 집회 사흘째인 24일부터 물대포 사용을 자제했던 경찰에 박 서장 폭행 논란은 강경대응으로 선회할 명분이 됐다. 이 서울청장은 이날 브리핑을 열어 “어제의 경우 경찰이 물포 사용을 자제하자 경찰과 시위대 간 직접 대치로 이어지면서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시민 불편이 극에 달했다”면서 “공무수행 중이던 경찰서장 등이 다치는 묵과할 수 없는 폭력사태에 대해 폭행 당사자뿐 아니라 주최 측에도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집회 현장에서 19명을 검거해 미성년자 3명을 제외한 16명을 조사했다. 이 가운데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의 장녀 수진(21·서울대 사회과학대 3년)씨 등 13명은 조사를 받은 뒤 27일 풀려났다. 경찰 관계자는 “연행자 가운데 경찰 기동대원을 폭행한 혐의가 있는 이들은 철저 조사 뒤 신병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또 박 서장을 폭행한 혐의로 이날 긴급체포한 김모(54)씨에 대해서는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박 서장 느슨한 판단 논란도
하지만 박 서장이 안일한 판단으로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장 지휘관이 경찰관 복장으로 성난 시위대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집회 참가자들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한미FTA저지범국본 한선범 국장은 “갑자기 나타난 서장에게 시위대가 과도한 집회 관리에 대해 항의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발생했다”며 “당시 경찰이 정당연설회 내내 해산방송을 틀면서 방해하고 지하철 역사를 원천봉쇄해 집회 참가자들이 매우 분노한 상황이었는데, 서장이 제복 차림으로 나타난 것은 시위대를 자극해 폭력을 유도하고 도덕성을 깎아내리려는 꼼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서울청장은 “경찰관이 불법행위자를 제지하고 경고하는 건 법치국가에서 당연한 일”이라며 “(화를) 자초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태영·박현준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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