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2주 정도 남은 2011년, 마무리에 바쁘지만 시작되는 것도 있다. 송년회 술자리다. 송년회는 한해 동안 고생한 동료가 모처럼 둘러앉아 새출발을 다질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많은 직장인은 앞으로 밀려들 술잔에 걱정이 앞선다.
영화관 송년회, 스키장 송년회 등 이색 송년회가 각광받는다고 해도 ‘남의 나라 얘기’이기 십상이다. 고깃집은 여전히 송년회 예약장소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직장인들의 마지막 전장인 송년회, 어떻게 보내야 가뿐하게 새해를 맞을 수 있을까?
대기업 영업부 6년차 허모(35) 팀장. 술자리에 앞서 숙취해소제 한 병을 비우며 한숨을 쉰다. 맥주 한잔에도 눈앞이 핑핑 도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그는 “연말이 되니 ‘기회는 이때다’ 싶어 술을 계속 먹인다”며 “감시(?)도 삼엄해져 술을 버리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매년 송년회 꼴불견으로 ‘술을 강요하는 사람’이 순위에 오른다. 직업정보사이트 ‘파인드 잡’이 올해 남녀 직장인 10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직장인 69.9%가 “먹고 마시는 송년회는 바뀌어야 한다”고 답했다. 온라인 교육사이트 에듀스카에서 실시한 설문에서도 술을 강요하는 상사가 가장 꼴불견이란 응답이 50%를 넘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관공서와 대기업들은 지난해부터 ‘119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차만 갖고, 1가지 술만 마시고, 9시 전에 끝내자”는 운동이다.
술을 피하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허 팀장은 “6년간 살아남은 노하우”라며 몇 가지 ‘꼼수’를 털어놨다. 우선 빨리 와서 좋은 자리를 선점할 것. 늦게 오면 주는 대로 술을 마셔야 하는 상사 앞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물잔을 준비해서 술을 버리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첫인상이 중요하므로 첫 잔은 무조건 ‘원샷’해 기선을 제압하는 것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 잔도 못 마신다면? 소주를 입에 머금고 고깃집 물수건을 입에 가져다 댄다. 그는 “물수건을 다섯 번이나 교체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되는 이야기들
술 기운에 기분 좋아진 부장, 오늘 송년회 자리에서 “계급장 떼고 다 말해봐”라고 말한다면? 진심을 다 꺼내보였다간 암울한 새해를 맞을 수 있다. 외국계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강모(29·여)씨에게 지난해 송년회는 악몽이다. 업무에 관한 팀장의 질문에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을 내놓은 게 화근이었다. 업무 경과를 다시 따지자는 팀장의 강요에 그날 12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지난 일을 검토해야 했다.
한 취업포털사이트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세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자리 구분 못 하고 일 이야기를 하는 상사’, ‘정색하고 일 이야기를 해 분위기를 깨는 동료’를 꼴불견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간의 스트레스를 풀 듯 남의 뒷담화를 하는 동료도 ‘진상’으로 꼽혔다.
대기업 인사팀 김모 대리는 술 기운에 불만을 토로하다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가 간혹 있다며 “특히 젊은 층은 들뜬 분위기에 하고 싶은 말 다했다가 두고두고 후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 대리는 평소 자신의 불만을 쌓아두다 술자리에서 터뜨리기보단 문제가 생겼을 때 적절히 의견을 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먼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후배
직장 상사들도 불만은 있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밉상’ 신입사원들이 송년회 때마다 속을 끓게 한다. 국내 법무법인에 다니는 2년차 최모(28)씨는 지난해 송년회에서 혼이 났다. 송년 모임 다음날 업무가 걱정돼 일찍 자리를 뜬 그는 다음날 선배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조직문화는 아직 수직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건설업체 인사팀의 최모씨는 “회사 선배들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후배를 가장 얄미워한다”고 전했다. 술자리 분위기를 깨는 데다, 일을 제때 마감하지 못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대기업 홍보실 김모 대리는 “처음부터 날짜를 잡을 때 사원을 고려해서 잡는 게 최상책”이라고 말한다. 또 “젊은 사원들은 옛날과 달라서 이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송년회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술김에 치근대는 직장상사
여직원들에게는 술 말고도 장애물이 하나 더 있다. 술김에 치근대는 직장상사는 고발감이다. 출판업체에 다니는 유모(31·여) 대리는 지난해 송년회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거래처와의 송년회 자리에서 거래처 부장이 1년차 여자 후배에게 노골적인 성적 농담을 던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해당 거래처에 주의를 당부했지만 부장에게 말이 들어갔을 리 없다”며 “술자리에선 남자직원이 갑(甲), 여자직원이 을(乙)”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기업 인사팀의 이모(32·여)씨는 대부분의 여직원이 직장상사나 동료직원과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성추행 등에 대해 70% 이상이 ‘그냥 참고 넘어간다’고 말했다. 징계 여부가 불투명한 데다, 송년회인 경우 연말 연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다. 이씨는 “기업들이 사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세워두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선형 기자 linea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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