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는 그리스 신화와 성서에 여러 번 나온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도주의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머리에 담쟁이덩굴을 두르고 손에는 큰 술잔을 든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포도주 제조법을 가르쳐준다. 성서의 포도주 관련 구절은 더 많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장면에서 그 자식들의 운명이 결정된 것부터 시작하여 신약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라는 비유, 물로 포도주를 만든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그리고 예수의 최후의 만찬 등으로 유명하다. 신화와 성경에 등장할 만큼 신비로운 포도라는 과일은 추종을 불허하는 향기와 생명을 살릴 만한 놀라운 맛으로 승부한다. 그런데 하필 술잔을 들고 거룩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다니….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인류를 위해 처절하게 죽어야 하는 각본대로 탄생했고 예수는 각본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탄생은 곧 그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하필이면 포도주를 자신의 피로 상징했을까.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포도주는 축제의 기쁨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참담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비통한 슬픔을 모두 상징하기 때문인가. 그의 탄생과 최후를 사색하는 지금, 포도주는 포도 본연의 단맛을 떠나 떨떠름하다. 눈물처럼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맛이 그 멋진 선언을 더욱 선명하게 들려준다. ‘술을 들어 올려 내 피’라고 명명한 예수의 선언의 참뜻을 헤아려보는 연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선 소설가·크리스천문인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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