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시위의 현장에서 국민적 축제의 공간으로 다시 전 대통령의 노제 장소로 쓰이는 서울광장은 `한국 현대사의 증인'으로 부를만한 공간이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 역사의 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7년 민주화 투쟁 때다.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던 1987년 6월 9일 시위에 참여해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치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숨진 이한열 열사의 노제가 열린 곳이 바로 이곳.
같은 해 7월 9일 이곳에서 열린 노제에는 100만명(경찰 추산 15만명)에 가까운 추모 인파가 몰려 민주화 운동의 절정을 이뤘다.
민주화 시위의 현장으로 쓰이던 서울시청 앞 광장은 `꿈의 축제'로 불린 2002년 월드컵을 맞아 축제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리응원전이 이곳에서 펼쳐지면서 한국-미국전 15만명으로 시작해 포르투갈전 47만, 이탈리아전 55만을 거쳐 독일전 때는 80만명의 인파가 이곳에 몰려들었다.
2004년 5월 1일에는 40여년 간 서울시청 앞을 지켜온 분수대가 사라지고 잔디 광장이 조성돼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본격적으로 탈바꿈했다.
교통혼잡 가중 등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시장 재직 시절 이명박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한 서울광장 조성은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아 시장 시절 주요 치적의 하나로 남았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취임 후 최대의 이슈로 떠올랐던 촛불집회가 열린 곳도 이곳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친 시위 인파가 점차 불어나면서 6.10항쟁 21주년인 지난해 6월 10일에는 시민 수십만명이 서울광장을 비롯한 도심 일대를 가득 메우고 시위를 벌였다.
1년의 시간이 흐른 오는 29일에는 노 전 대통령의 노제가 바로 이곳에서 열려 서울광장 주변에 다시 한번 수많은 인파가 몰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겨보게 된다.
서울광장이 이처럼 역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곳의 지리적 위치가 갖는 상징성 때문으로 여겨진다.
세종로, 을지로, 태평로 등 도심의 주요 도로가 집결하는 곳인데다 정부종합청사가 그리 멀지 않아 정치적ㆍ사회적 주장을 펴기에 적합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또 4천평에 달하는 서울광장에 더해 주변 도로를 합치면 대규모 집회나 행사를 갖기에 충분한 공간이 나오는 것도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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