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 조성으로 생긴 호수와 어우러져 백두산 천지 같은 비경 탄생
예부터 ‘남주명향(南州名鄕)’으로 불려온 전남 화순의 명승지 모후산(母后山·919m)과 적벽(赤壁)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상쾌했다. 모후산은 ‘국내 3대 숲길’로 선정된 생태숲이 온 몸으로 반기고, 적벽은 비록 식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통제되고 있지만, 천혜의 붉은 띠 절벽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머니 품처럼 안온한 산
고려인삼 시원지는 개성이 아니다. 바로 화순군 동복면 유천리 모후산이다. 고려 숙종 1095년 이 마을 최씨성을 가진 사람이 중병을 앓자, 그의 부인이 산신령에게 간구해 산삼을 얻은 후 그 종자를 재배한 것이 인삼 재배의 시초였던 것. 지금도 인삼(산양삼)은 화순의 10대 농산물 중 하나다.
모후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유마사(維摩寺)는 또 어떤가. 백제 무왕 28년(627년) 요동 태수를 지낸 유마운과 그의 딸 보안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니, 본찰인 순천 송광사보다 대략 200여년 앞선다. 빨치산의 본거지였다 하여 파괴됐다가 복원 중이어서 쇠락한 모습이지만, 보안과 비구승 사이의 감동적 설화가 얽힌 ‘제월천’이며 보물 제1116호 ‘해련부도’가 옛 영화를 말해 준다.
모후산의 원명은 나복산. 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자비령을 넘어 쳐들어 오자 왕은 부인과 함께 모후를 모시고 이곳까지 숨어들었다. 떠날 때 그 산세가 어머니 품처럼 따뜻했다 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진다.
◇눈이 내렸을 때의 모후산 전경(사진 위)과 스산한 겨울임에도 빼어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는 노루목적벽. |
생태숲은 주차장부터 시작된다. 유마사와 용문재 사이 약 900m 구간에 삼각주 모양으로 너르게 조성돼 있다. 아름드리 적송이며 쭉쭉 뻗은 삼나무, 편백나무 등에서 사시사철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산책로가 신작로처럼 넓어 가슴이 툭 터지는 느낌을 받는다. 화순군민들이 1년여 동안 ‘숲가꾸기 사업’을 벌여 ‘명품 숲길’을 탄생시킨 것이다. 생태숲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전국에서 벤치마킹하느라 바쁘다. 너덜강대나무숲길 등 3가지 테마코스가 조성돼 있고, 꽃을 잃은 개난초(상사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등산을 원한다면 생태숲에서 1.8㎞ 거리의 모후산 제3봉인 집게봉(788m)까지 치고 올라간 뒤 중봉(804m)∼정상(919m)에 이르는 능선 코스가 별미일 듯하다. 능선에 오르면 일부 순천 땅도 조망할 수 있다. 산기운이 여간 좋지 않다.
#소동파의 ‘적벽부’와 쌍벽을 이룬 곳
‘적벽’은 화순군 이서면에 있다. 옹성산(573m) 자락을 둘러친 7㎞ 기암절벽을 일컫는다. 그 아래 눈이 시리도록 푸른 동복천(동복호)이 휘감아 돈다. 이 구간에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 등 깎아지른 절벽 4곳이 유난히 눈에 띈다. 가장 높은 것이 노루목 적벽인데, 100m 높이의 기암절벽이 빚어내는 비경을 상상해 보라. 1985년 동복댐이 만들어지면서 절반가량이 호수에 잠겼지만 위용은 여전하다.
북면 백아산(810m)에서 발원한 동복천이 섬진강의 가장 큰 지류인 보성강으로 내달리는 중간쯤에 항아리 모양으로 엎어져 있는 산이 바로 옹성산이다. 댐이 없던 시절에는 동복천에 배를 띄워 적벽의 비경을 둘러보았다고 하니, 어디선가 뱃노래가 아련히 들리는 듯하다.
적벽이란 명칭은 조선의 문신 신재 최산두가 처음으로 붙였다. 1519년 기묘사화 후 화순군 동복면에 유배 중이던 그는 이곳 지세를 보는 순간, 소동파가 노래했던 양자강 황주적벽(동파적벽)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았던 것. 이후 석천 임억령은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고 표현했고, 하서 김인후가 적벽시를 지은 뒤 일약 전국적인 명승지가 됐다. 적벽이 이서면에 있어 ‘이서 적벽’으로도 불린다.
이후 많은 묵객과 풍류가 몰려들었고, 김삿갓의 방랑벽을 멈추게 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적벽에서 숱한 시를 남겼으며,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감했다. 훗날 노산 이은상도 찾아와 감탄하고 선계(仙界)에 비유하는 시 한수를 건졌으니, 유명한 ‘적벽’이다. “산태극 수태극 밀고 당기며/유리궁 수정궁 눈이 부신데/오색이 떠오르는 적벽 강물에/옷 빠는 저 새아씨 선녀 아닌가.”
4개 적벽 중 노루목적벽과 동복천 사이로 마주보는 보산적벽은 일반인의 출입을 불허한다. 동복호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까닭이다. 다만, 화순군청에 사전 방문을 신청하면 출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댐 조성으로 물이 노루목적벽 50m나 치솟아 오르면서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짙푸른 동복호가 어우러져 새로운 비경을 탄생시켰다. ‘백두산 천지’가 여기 또 하나 있지 않은가.
화순=글·사진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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