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420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 10월 황해도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한 장의 비밀보고서. 이 보고서는 이후 1000여명의 선비가 역모에 관련되어 처형 또는 유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중기 사림을 뒤흔든 사건 기축옥사(己丑獄事). 기축옥사는 바로 이 한 장의 보고서에서 시작되었다. 흔히 정여립 역모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1. 정여립은 누구인가?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최영경의 문집인 ‘수우당집’. |
한준은 급히 조정에 이 문서를 올렸고 3정승과 6승지가 참여하는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즉시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의금부 도사가 황급히 황해도와 전라도에 급파되었다.
이 사실을 감지하고 있던 정여립은 전북 진안의 죽도 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모의 주모자인 정여립의 자살. 그러나 그것은 조선중기 사림사회를 뒤흔든 엄청난 회오리의 첫 출발이었을 뿐이었다.
정여립(1546∼1589)의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이며 전주 출신이다. 첨정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
반대파에 의해 서술되었지만 그의 태몽에는 고려 의종 때 무신란을 일으킨 정중부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왕을 시해한 전 시대의 반역자가 꿈에 나타났다는 것은 정여립의 운명을 미리 점쳐준다.
정여립은 무예나 활쏘기에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또래의 우두머리로 활동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15세 때 이미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을 일을 맡아 보았는데 당시 아전들은 그의 부친보다 정여립이 업무를 처리할 때 훨씬 부담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강한 개성과 기질은 형제 및 친척과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학문적 자질은 뛰어나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좌랑, 홍문과 수찬 등의 요직을 거쳤는데 정여립의 순탄한 관로에는 그의 자질을 일찍부터 주목한 이이와 성혼 등 서인의 지지를 받은 인사들의 후원이 컸다. 당시 조선의 정국은 1575년(선조 8년)부터 시작된 붕당정치가 본격화되어가는 시기였다. 따라서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 인물은 필연적으로 한 당파의 정치노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여립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진 전북 진안 정천면 수동리의 죽도. 진안군청 제공 |
특히 그의 기질은 동인의 돌격장의 역할을 맡기에 충분하였다.
홍문관 수찬 시절 서인의 핵심인물인 박순·성혼 등을 극렬하게 비판한 후 서인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인 이이를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고 고향인 호남으로 낙향하기에 이른다.
중앙의 정치무대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오히려 호남 일대를 중심으로 그의 명망은 보다 높아갔다.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기질, 무예와 병법에 능한 활동가, 학문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 당시 지방사회에서 이만큼 교양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카리스마형 인물은 흔치 않았다. 당연히 그의 명망은 높아갔으며, 인근 지역의 수령들은 다투어 그의 문전을 두드렸다.
정여립의 다재다능한 능력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1589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부탁으로 왜적을 물리쳤을 때이다.
정여립은 무사나 공사 천민의 무리들을 이끌면서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여립의 이러한 자질은 반대세력의 주요한 공격거리가 되기도 했다. 1589년의 고변 때 반대파들은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 무장활동 등의 경력을 지적하고 실제 역모를 계획하였던 위험인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2. 사림(士林)사회에 회오리가 불다
‘연려실기술’에는 정여립의 역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기축년(1589년) 겨울 서(황해도)와 남(전라도)에서 일시에 병사를 일으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성을 직접 쳐들어가 무기고를 불사르고 조운(漕運) 창고를 약탈하며 심복을 도성 요소에 배치한다는 것이 역모의 기본 시나리오였다.
◇조식과 최영경을 배향한 덕천서원 전경. |
정여립이 황해도를 역모의 진원지로 삼은 데 대해서는 이곳이 일찍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정여립과 함께 역모에 핵심적으로 참여한 변숭복(안악), 박연령(안악), 지함두(해주) 등은 모두 황해도 출신이었다.
1589년 정여립에 대한 역모 고변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되고 주모자 및 연루자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정여립의 자살로 역모의 주창자는 사라졌지만 역모에 참여한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었으며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사가 시작되면서 이 사건의 파장은 점점 커졌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정국이 동인과 서인의 정쟁이 가열화되어 갔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월8일 서인의 돌격장 정철이 정언신을 대신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어 위관(委官:수사 책임자)을 맡으면서 사건에 연루된 동인 공격의 선봉에 섰다.
12월12일에는 낙안향교 유생 선홍복이 가혹한 수사를 받자 초사(招辭)에서 이발·이길·백유양 등이 연루되었다고 자백하였고, 12월14일에는 전라도 유생 정암수가 상소문을 올려 한효순·정개청·정언신 등 조정의 대신들이 이 사건에 크게 연루되었음을 주장하였다.
당시 역모 혐의로 상소문이나 공사(供辭)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인물은 대부분 동인으로, 서인들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정국의 전환을 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정국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동인의 공격에 적극 이용하면서 옥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향토사학자 신정일씨가 최근 펴낸 ‘지워진 이름 정여립’의 표지.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했다. 가람기획 제공 |
이후에도 남명 조식학파의 핵심인물인 최영경이 길삼봉이라는 무고를 받아 옥중에서 사망하고, 이에 연루된 남명의 문인들이 대대적으로 탄압받는 등 사건의 파장은 사림사회 전체에 휘몰아쳤다.
#3. 조선중기 정치·사상 변화의 분수령
정여립의 학문과 사상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주자성리학의 의리론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여립의 이러한 학풍과 사상은 16세기를 대표하는 학파 중 남명 조식학파와 화담 서경덕학파의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정여립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했던 최영경·이발·정개청 등은 남명이나 화담의 문인들로서, 이들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희생된 것은 이 사건이 조선중기 사상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정통 주자성리학의 학풍과는 거리가 있었던 화담과 남명의 학풍을 계승한 인물들이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자였던 것은 정여립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닌 사상적인 차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즉 이 사건의 주역인 정여립과 그 연루자들은 성리학의 이론이나 명분론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화담이나 남명학파의 학자들이었다. 기축옥사에서는 주로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절충적 성향이 강하고 보다 탄력적, 실천적인 성향의 계열들이 희생되었다.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국왕의 직접 조사를 받은 일부 하층민은 ‘우리는 반역이 아닌 반국(叛國)을 하였습니다. 반국은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한 것입니다’라고 하여 국왕의 쓴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는 정여립의 사상이 이론보다는 그 구체적인 실천행위, 즉 민생문제의 해결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여립은 스스로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 만큼 정통 주자성리학의 입장에서는 일탈한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이라는 사람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인의 통론은 아니다”라고 하여 경우에 따라 두 임금을 섬길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또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라는 중국 성현 유하혜의 말을 인용하여 세습되는 절대군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무사들을 직접 통솔한 것에서 미뤄 알 수 있듯이 병법과 무예에 대한 자질 또한 특별했다.
이외에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뜻으로, ‘목자는 망하고 전읍은 흥한다(木子亡 奠邑興)’는 동요를 옥판에 새겨서 지리산 석굴에 감추어 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여론 조성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당시 정여립 역모사건 수사 책임을 맡은 송강 정철의 초상. 조선 서인세력은 1589년 정여립의 역모 혐의를 기축옥사 등 동인세력에 대한 숙청 등의 기회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
정여립은 명분론, 성리학의 이론 탐구만을 중심사상으로 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능력이 있는 인재가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에게 보수적인 조선사회는 너무나 큰 장벽으로 다가섰다. ‘천하는 공물’이라고 외쳤지만 그 공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을 만큼 정여립이 선택한 길은 결국 ‘역모’라는 극단이었다.
혁명을 꿈꾸었지만 그 혁명은 착수하기도 전에 실패로 끝났고, 정여립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기축옥사라는 대참극의 단서를 제공했다.
조선중기의 풍운아 정여립의 죽음과 이로 말미암아 파생된 대참극 기축옥사. 이 사건은 급진적인 지식인이 존재할 수 있는 조선중기의 토양 또한 매우 척박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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