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간(麥稈·보릿대) 공예는 아직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단어다. 보리 줄기인 보릿대를 이용해 구현하는 섬세하고 차원 높은 공예예술이라지만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궁금증과 설렘을 안고 지난 12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권선시장 인근에 자리 잡은 맥간공예의 본산인 맥간공예연구원을 찾아갔다. 1층 벽면에 맥간공예연구원 간판이 걸려 있는 2층 건물의 지하로 들어서자 반백의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은 맥간공예 창시자 이상수(53)씨가 소매를 걷어붙인 남방 차림으로 작업을 하다 반갑게 맞았다.
◇맥간공예의 창시자 이상수씨가 지난 12일 맥간공예연구원에서 자신의 크기만한 각종 맥간공예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무실 안의 쪽문을 열자 사무실과 비슷한 크기의 또 하나의 공간이 나왔다. 색칠과 건조대 등을 갖춰 한눈에도 전문 작업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에 들어서자 이씨는 “이곳은 아무도 들이지 않는 혼자만의 작업공간이다”라며 웃었다. “이곳은 맥간공예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마지막 단계의 색칠과 건조, 보관이 이뤄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씨가 맥간공예에 눈을 뜬 것은 19살 되던 1977년, 경북 청도의 사찰인 동문사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다. 1958년 경남 밀양에서 부농의 2남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난 이씨는 집안에 자신의 생활을 전담해 주는 가사도우미가 따로 있을 정도로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부친을 여읜 뒤 고향 친척들의 반대에도 가족들과 함께 작은 아버지가 사는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은 것은 가족 모두 같았다. 결국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의지하던 형마저 집을 나가버리자 이씨는 걷잡을 수 없는 방황의 길로 빠져들었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지만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방황은 심화했고, 급기야 세상을 적대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그만 시비거리만 있으면 싸우기 일쑤였고, 사람들과도 거리를 멀리했지요.”
하지만 이씨에게는 어려서부터 특이한 재주가 있었다. 한 번 본 사물이나 경치를 잊지 않고 도화지에 그대로 옮겨 그리거나 조형물로 형상화할 수 있었는데, 주위 어른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이씨는 힘들었던 수원에서의 초등학교 시절에도 미술 관련 상은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방황의 골이 깊어질 즈음 집을 나간 형이 스님이 돼 자신을 찾았고, 청도의 동문사로 들어가 탱화를 그리며 새 삶을 살 것을 권했다. 세상이 싫었던 이씨는 망설임 없이 동문사로 향했고, 절로 들어가기에 앞서 몸에 걸친 옷 한 벌을 제외하고는 가슴에 품고 다녔던 가족사진과 애지중지하던 그림도구, 책 등 모두를 불태웠다.
“지금도 기억하기 싫은 그때까지의 모든 인연을 깨끗이 털어버리자는 생각에서였다”며 이씨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절에서 생활을 하며 마음을 추스르면 추스를수록 이씨의 기슴 한 구석에서는 미술에 대한 욕구가 더욱 솟구쳤다. 탱화를 그리려 했지만 스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계(法戒) 때문에 고민하던 이씨에게 ‘번쩍’ 다가온 것이 ‘보릿단’이었다.
어려서부터 마을 어른들이 보릿대를 이용해 모자나 반짇고리, 돗자리 등을 만들던 일을 떠올린 이씨는 잘 썩지 않고 은은한 빛을 내는 보릿대를 이용해 순수예술세계에 도전하자는 마음을 다지게 됐다.
이씨가 구상한 보릿대 활용 예술은 여러 개의 보릿대를 얇게 편 뒤 이어 보릿대 종이를 만들고, 이를 활용해 자연의 질감이 살아 있는 예술작품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이씨는 곧바로 산비탈에 쌓여 있는 보릿대로 종이 만들기에 나섰고, 2년여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성공했다.
이씨는 “크게는 폭 1m, 길이 2m 크기의 보릿대 종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접착체를 써도 울지 않고 보리 빛깔과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종이를 만들 수가 없었다”면서 “2년여간 보릿대에 짓무른 손을 부여잡고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원하는 보릿대 종이를 만들게 됐는데 세상 모두가 내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이후 이씨는 ‘보릿대 종이로 작품을 만들겠다’며 동문사를 나와 1979년 상경했다.
“우선은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주로 밤에 공장일이나 일용직으로 일했는데, 작품연구도 하고 해당 분야 예술가를 만나 작품 아이디어도 얻어야 하기에 낮에 하는 평범한 일은 엄두도 못냈죠. 한 6개월쯤 돈이 모이면 그 돈 가지고 다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돈이 떨어지면 다른 곳에 취직해 일하는 식이었죠.”
이씨는 작품에 대한 당시의 열정을 이같이 설명했다. 공장 창고 등에서 하루 2∼3시간 자며 작품활동을 하던 이씨는 ‘원하는 예술품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이듬해인 1980년 종이 제조기법에 대한 실용신안등록을 신청해 1982년 허가를 받았다. 이어 이렇게 만든 종이에 염색 없이 전통 5색(빨·주·노·초·파)이 보릿대에 스밀 수 있는 기법을 창안해 1992년 두 번째 실용신안등록에 성공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5종의 실용신안등록을 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보릿대 공예, 즉 맥간(麥稈) 공예다. 맥간공예는 모두 12∼14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작품이 탄생하지만 크게는 보릿대를 펴는 세공과 디자인, 색칠 등 3단계로 분류된다. 먼저 작품의 바탕이 되는 밑그림을 그린 뒤 보릿대를 펴서, 도안 위에 모자이크 방식으로 붙이고 목칠공예로 마무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최고급 과정이 색칠인데 보통 하루에 한 차례씩 일주일간 이어진다.
이씨는 맥간공예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작품화에 나섰고, 1986년까지 27점의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전시였다. 서울의 전시관들은 맥간공예가 낯선 것인 데다 이씨의 학력 등을 이유로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물론 대여 비용이 없는 것도 큰 이유였다.
결국 수원으로 다시 내려온 이씨는 단칸 월셋방을 얻어 작품을 보관하며 전시관 이용을 위해 발품을 팔다 지인의 도움으로 팔달문 인근 건물 지하에 있는 20여평 규모의 ‘선화랑’으로부터 전시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맥간공예 창시자 이상수씨가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손질하고 있다. |
이 같은 노력 끝에 전시회는 대성공이었고, 전시회가 끝나기 전 작품 모두가 팔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맥간공예의 예술성이 알려지면서 이듬해 서울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중고생이 단체관람을 오는 등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어 1988년 KBS 부산지국 신관개 관기념 초대전시회를 갖는 등 지금까지 모두 7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이제는 중국과 홍콩·싱가포르 등지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전의 단골 초대손님이 됐고,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회장 김종만)가 수여하는 제3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을 수상하고 경기도 으뜸이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씨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삼성전자에서 이씨를 동호회 강사로 초빙했다. 일주일에 한 차례 40여명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폭발적 인기를 끌자 회사 측에서 월∼금요일 5일간 강의를 요청했고, 수강생도 300여명이 넘었다.
이를 계기로 맥간공예를 연구하는 예맥회가 전국 10곳에 만들어졌고, 전국적으로 수천명의 문하생도 두게 됐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여전하다. 맥간공예를 바탕으로 한 금박공예를 예술로 끌어올려 해외로 진출하려는 의지 때문이다.
이씨는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여기까지 온 것이 꿈만 같습니다. 앞으로 금박공예 분야의 세계 최고라고 하는 일본으로 진출해 한국인의 장인정신을 알리고 싶습니다. 일본의 공예술은 모두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기 때문이지요”라며 환하게 웃고는 “한국의 맥간과 금박예술이 세계 최고임을 꼭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수원=김영석 기자 lovek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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