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과 학생들 한자 ‘機械’ 못 읽고
부동층 = ‘움직이지 않는 층’ 이해
한자 의미 몰라 어휘력도 형편 없어 ‘꾸옥 응으’. 베트남에서 쓰는 로마자식 표기 수단이다. 프랑스 지배를 받은 베트남은 19세기 말 ‘꾸옥 응으’를 도입하고 한자를 없앴다. ‘꾸옥 응으’는 한자 ‘國語’(국어)의 베트남식 발음이다. 한자를 안 쓴 지 100여년. 이제 ‘꾸옥 응으’의 뜻을 정확히 아는 베트남인은 많지 않다. ‘꾸옥 응으’를 그저 로마자 ‘quoc ngu’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라는 위기감이 어문 전문가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한자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한자를 잃어버리는 게 시간문제라는 우려다.
기계과 학생이 ‘機械’(기계)도 못 읽는다?
남기탁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30일 “요즘 대학생들 한자 실력이 너무 떨어진다”고 한탄했다. 자기 이름, 자기 학과 이름조차 한자로 못 쓰는 학생이 수두룩하다는 것. 수능 성적이 좋은 의예과 학생들조차 ‘의예과(醫豫科)’의 ‘豫’ 자를, ‘藝’ 자로 쓰는 일이 많다고 한다. 천안함 폭침사건 때에는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려고 ‘초계함’의 뜻을 물었더니 제대로 답변하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남 교수는 “‘망볼 초’(哨)와 ‘경계할 계’(戒)를 알면 쉽게 알 수 있는 말”이라며 “학생들은 ‘패트롤 십’(patrol ship)이라고 하면 쉽게 안다”고 말했다.
지방의 K대와 D대에 한문 강의를 나가는 박찬두 동도중 국어교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기계과 학생들은 ‘機械’라는 한자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부동층’의 뜻을 물으면 ‘움직이지 않는 층’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해 ‘떠다니는 것’(浮動)을 ‘움직이지 않는 것’(不動)으로 이해한 답변이다.
월간 ‘어문생활’이 지난해 5월 전국 23개 대학교 학생 21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7.8%가 한자를 몰라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쓸 줄 안다는 학생은 60.2%, 자신과 부모의 이름을 모두 한자로 쓸 수 있다는 학생은 24.7%에 지나지 않았다.
어문 전문가들은 1970년 초등학교 한자교육이 금지된 이후 학교교육에서 한자 위상이 날로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현행 중·고교 교과과정에 한문이 선택과목으로 들어 있다. 상당수 학교가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한문 공부가 대학 진학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 열심히 하지 않는다.
한국어문회 박광민 연구위원은 “논문을 읽다가 낯선 용어가 나와 저자에게 문의하면 정확히 뜻을 모르는 일이 있다”면서 “일본인 학자가 서구 용어를 한자로 풀이한 걸 국내 어느 학자가 들여오고 그 다음부터 한글로만 인용되다 보니 빚어지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한자 모르다 보니 한글도 제대로 몰라
‘국민들의 자괴감을 상세(상쇄)시켜 주기 바란다’, ‘서울시 재설(제설) 대책 비상’, ‘벌떼 출연(출현) 창문을 열지 마세요’, ‘ 大東與(輿)地圖’, ‘赤貧如洗: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여 먹을 정도(물로 씻어낸 것처럼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함’….
남 교수는 얼마 전 춘천의 한 태권도 도장 옆에 붙은 광고전단을 한참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단에는 ‘석기회원 모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는 ‘조기청소’, ‘조기축구’의 ‘조기’(早起) 뜻을 정확히 모르다 보니 늦은 밤 운동하는 회원을 ‘석기회원’으로 엉뚱하게 표기한 것이다.
한자를 제대로 몰라 엉뚱하거나 맞춤법에 어긋나는 말을 쓰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방송과 영화, 교과서, 심지어 국어사전에서도 그렇다. 이명학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대학생들이 ‘현재’를 ‘현제’로, ‘게재’를 ‘게제’로 쓰고, 초등학생이 ‘재산’을 ‘제산’으로 쓰기도 한다”면서 “한자어가 우리말의 70%가량을 차지하는데도 한자를 제대로 익히지 않다 보니 우리말이 엉망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서울·경기지역 3개 고등학교 2학년 60명을 대상으로 어휘력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는 전의를 상실했다’, ‘권력을 장악했다’, ‘농민들이 봉기했다’와 같은 문장을 제시하고 ‘전의’, ‘장악’, ‘봉기’의 뜻을 문맥에서 파악해 적도록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전의’에는 ‘의욕’, ‘자신감’, ‘무언가 할 의욕’ 등이, ‘장악’에는 ‘모두 다 자기 것’, ‘독점’, ‘억지로 빼앗아 갖게 됨’, ‘활개를 치다’ 등이, ‘봉기’에는 ‘혁명을 일으키다’,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싸우다’, ‘난을 일으키다’, ‘데모하다’ 등이 답변으로 나왔다.
이 교수는 “한글전용론자들 주장처럼 한자어를 문맥상으로 파악하더라도 본뜻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봉기’를 ‘무언가 할 의욕’으로 이해한 학생이라면 ‘나는 새해가 되어 전의가 생겼다’고 쓰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희준 기자 july1st@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