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 애플 창업, 암투병….’
현대 기술 문명사의 슈퍼 마에스트로 스티브 잡스의 일생은 롤러코스터였다.
그는 두 세기에 걸쳐 두 번의 디지털 혁명을 일으킨 뒤 세상을 떠났다. 잡스는 20세기 1980년대 매킨토시로 PC 시대를 열고, 21세기에는 자신이 주도한 PC 시대를 스스로 종식시키고, 포스트 PC 시대를 여는 제2의 기술 혁명을 선보였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사이에 그가 만든 애플2는 한때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절반을 석권했다. 2001년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아이팟을 시작으로 2007년 스마트폰인 아이폰, 2010년 태블릿 PC 아이패드 시리즈가 나왔다.
전 세계의 애플 마니아는 성지 순례를 하듯 애플 매장을 찾고 있다. 한 잎 베어먹은 애플의 로고는 성경 속의 사과, 뉴턴의 사과에 이어 인류역사의 3대 사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선지자처럼 나타나 애플 신제품을 선보일 때마다 지구촌은 미지의 신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잡스는 하드웨어 엔지니어가 아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도 아니다. 그는 최고의 인재를 끌어 모아 최고의 첨단 제품을 만들도록 독려하는 디지털 지도자였다.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천재이기도 했다. 잡스의 성공 뒤에는 광신도처럼 그를 따르는 일군의 소비자가 있다. 잡스는 이를 자산으로 크로스오버(교차) 기술의 신기원을 열었다.
마지막 PT 야윈 모습의 스티브 잡스가 지난 6월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열린 ‘세계개발자콘퍼런스(WWDC2011)’에서 애플판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이클라우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분 좋습니다’로 시작한 이날 프레젠테이션은 결국 잡스의 생전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이 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사고뭉치였던 잡스는 초등학생 시절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용 전자공학 키트를 접하면서 전자제품 작동원리를 깨달았다. 고교시절 휴렛팩커드에서 방과 후 수업을 들으면서 전자제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명문 리드대학에 진학했지만 “부모님들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워” 한 학기 만에 중퇴했다.
이후 그는 천재 공학도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1976년 캘리포니아 로스알토스에 있는 양부모의 집 창고에서 애플사를 창업했다. 이듬해 개인용PC 애플2를 내놓았다.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인기를 끌었다. 1980년 주식을 공개해 수백만달러를 벌었다. 1984년에는 당시 컴퓨터업계의 거인 IBM에 대항해 최초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리사를 선보였다. 하지만 1985년 자신이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회사에서 쫓겨나는 고배를 마셨다. 의욕적으로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이유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잡스는 새 컴퓨터 회사 넥스트를 만들어 재기에 나섰다. 그는 고난을 성공의 양분으로, 실패를 성공의 기반으로 여겼다. 넥스트가 만든 기술은 훗날 월드와이드 웹의 탄생에 일조했다.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인수해 최초의 CG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를 내놓아 공전의 히트를 친다.
잡스는 40대에 접어들어 넥스트를 애플사에 팔고, 경영난에 빠진 애플사 CEO로 복귀한 뒤 혁신의 신화를 낳기 시작했다. 잡스는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내놓으며 대박행진을 이어갔다. 애플사는 세계 최고 IT 기업으로 등극했다.
그는 1974년 인도여행을 통해 불교와 동양사상을 접했다. 그는 불교를 접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꼽았다.
잡스는 자신과 첫 번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수년간 돌보지 않은 나쁜 아빠이기도 했다. 그는 1991년에 현재의 부인과 결혼해 세 자녀를 더 두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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