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법원 판결 효력 없다”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한 일본재판소 판결은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므로 그 효력을 승인할 수 없다.”
대법원이 24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한 이유다. 앞서 항소심이 “이번 소송이 (일본에서 있었던) 종전 소송과 동일한 이상 그와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며 일본재판소의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아들인 것을 대법원이 뒤집은 것. 1965년 정부와 일본이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본 판단도 역시 파기됐다. 당시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대법원은 이날 판결의 의의를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피해 입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여러 소송에서 승소 가능성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라고 규정했다. 일본재판소에서 패소했더라도 우리 법원을 통해 배상받을 길을 터준 것이다.
대법원은 원고 청구를 모두 기각한 일본 판결에 대해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해,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법원은 “이런 일본 판결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므로 그 효력을 승인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민사소송법 217조가 규정한 외국법원 확정판결 승인 요건 가운데 ‘그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게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 징용 피해자 김규수(83)씨 등 9명은 1995년부터 히로시마지방재판소와 오사카지방재판소에 각각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이후 한국에서도 소송을 제기, 2009년 부산고법과 서울고법 항소심에서도 패소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청구권 협정 부정…국가의 ‘개인청구권 소멸’도 인정 못해
이번 소송의 또 다른 쟁점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과 우리 정부가 10여년간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한 끝에 1965년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당시 일본은 우리 정부에 10년간 3억달러 무상제공과 2억달러 차관 제공을 대가로 ‘한국 정부는 물론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한 청구권을 소멸시켰다’는 법률까지 제정했다. 일본재판소는 이 법률을 근거로 동일 소송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그러나 “청구권협정 협상에서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 때문에 양국은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대법원은 “국가가 조약을 통해 개인의 동의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 소멸시킬 수 있다는 건 근대법 원리와도 상충한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일제 식민지가 불법이라든지, (징용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 부분 등은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면서도 “정부 입장과는 상이한 부분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심층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위안부나 사할린 피해자와 달리 강제징용 보상문제는 청구권협정에 포함돼 있어 정부가 나서서 일본 측에 보상을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동진·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