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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노무징용 조선인 100만이상 추정

입력 : 2012-05-24 23:14:07 수정 : 2012-05-24 23: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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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실 피해조사委 발간 실태조사서
군인·군속 37만 등 약600만명 끌려가
전남 여천에서 태어난 조용섭(88)씨는 18세 때인 1942년 11월 일본 규슈의 미쓰비시 호조 탄광으로 끌려갔다. 탄광에서 2년간 일했는데도 재계약이 됐다는 이유로 집으로 보내주지 않은 데다가 막장에서 사고로 다리를 다쳤지만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작업장을 탈출했다. 그는 광복 직전인 1945년 5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후유증으로 농사도 짓지 못하게 됐다. 조씨는 “늙은 게 한이지만 나 죽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발간한 강제동원 구술집 ‘당꼬라고요’에 소개된 피해 사례다. 당꼬는 탄광의 일본식 발음이다.

위원회는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던 일본 내 3대 탄광 중 한 곳인 니시소노기군 사키토(崎戶) 탄광은 광부 3명 중 1명꼴인 1700여명이 조선인이었다는 진상조사 결과를 2010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 숨진 조선인 사망자 기록을 담은 이 지역 ‘매화장인허증’을 분석한 결과 명부에 직업이 기재된 115명 중 113명은 탄광 노동자였는데, 변사가 29건이나 되는 점에 비춰 정황상 구타 등 가혹행위로 사망한 사례도 많은 것으로 추정했다.

조씨처럼 강제 노무징용된 조선인은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후생성 자료를 토대로 조선상공회의소에서 편집·간행한 ‘조선경제통계요람’ 1949년판에는 1939∼45년 전시 노무동원자 수가 112만9812명으로 기록돼 있다. 석탄광산 49만3005명, 금속광산 11만3258명, 토건 17만6889명, 항만 하역 3만9153명, 기타 30만4857명이다.

또 강제동원 문제를 일본 내에서 처음 공론화한 재일동포 박경식씨가 1965년 일본에서 발간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는 1939∼45년 일본에 징용된 사람이 100만명, 조선 내에서 동원된 사람이 450만명, 군인·군속 37만명 등 약 600만명이 끌려갔다고 추정했다. 일본의 민간단체인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도 1974년 조선인 강제동원 숫자가 150만명에 달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우상규 기자 skw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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