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수상작 심사위원들 모두 찬사
군상의 욕망·고통 맛깔나게 그려 제9회 세계문학상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대상 외에 약간 편의 우수작을 선정하고 모두에게 출판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1차 심사를 거친 12편 중 우수작으로 뽑은 5편은 ‘슈나벨 최후의 자손’ ‘당신의 파라다이스’ ‘망원동 브라더스’ ‘사이공 나이트’ ‘선량한 시민’이다. 서로 중복되지 않는 저마다의 장르적 개성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일정한 문학적 성취도 이뤄 ‘다품종 장편소설’ 시대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뛰어난 장편소설은 혼자 나타나지 않는다. 다종다양한 장편소설과 다양한 개성의 독자들이 두껍게 지층을 이루고 또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고 뒤섞이는 기이한 가역반응을 겪으며 생겨난 ‘변종’이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나아가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된다. 심사 과정에서 우리가 느낀 건 지금이야말로 변종이 나타날 때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제9회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세계일보 편집국 회의실에 모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신승철(소설가·도서출판 비채 주간), 김석진(독자·인터파크도서 선정 ‘파워북피니언’·건설업), 정은영(자음과모음 주간), 심진경(문학평론가), 정이현(소설가), 이순원(〃), 김미월(〃), 구경미(소설가·현대문학 단행본팀 편집팀장), 김도언(소설가·웅진 문학 임프린트 ‘곰’ 대표) 심사위원. 남정탁 기자 |
‘슈나벨 최후의 자손’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 서사를 다뤘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프랑켄슈타인적 욕망이라는 고전적 테마와 완전히 새로운 도시 공간을 창조하려는 기업가적 야망을 결합시켜 새로운 좀비 장르를 만들었다. 다만 기괴한 생명체의 낯선 존재론을 전달하기 위해 관찰자 혹은 청자를 등장시키는 방법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하면 가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사랑과 우정, 이별, 그리고 타국에서 만난 조선인들의 공동체 의식 등 빤해 보이는 주제를 섬세한 인물 묘사와 긴장감 있는 플롯으로 잘 그렸다. 임팩트 있는 인물이나 에피소드를 보강하면 이민소설의 새 장을 여는 이정표가 되리라 확신한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10대부터 6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남성들이 30대 백수인 ‘나’의 서울 마포구 망원동 옥탑방에 모였다 흩어지는 한 시절을 코믹한 설정과 문장으로 맛깔나게 그려냈다. 우리 시대 남자들의 초상이라 할 만큼 지나치게 세대별 남성을 정형화하려 한 점이 다소 아쉽지만 망원동이란 공간에 대한 체험적 지리지를 잘 활용해 에피소드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사이공 나이트’는 몰입도가 가장 높은 소설이었다. 전체적 구성이나 인물 설정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결말의 반전까지 몰고가는 서사적 파워가 강하다. 중년의 피로감이 짙게 밴 남자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이 다다르게 되는 비극적 죽음 혹은 삶을 누아르풍으로, ‘수컷’ 향기 짙게 다뤄 남성 독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몇몇 심사위원은 여성을 묘사하는 ‘전형적’ 방식이나 지나치게 영화 시나리오 같은 인상에 점수 주기를 주저했다.
‘선량한 시민’은 평범한 여성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연쇄살인 행각과 이 연쇄살인이 폐쇄적 마을에서 하나의 ‘놀이’로 희화화되는 과정을 정밀하게 파고든 추리소설이다. 반전을 거듭하다 결국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여성인 주인공의 ‘거울쌍’ 역할을 하는 남성 캐릭터를 더 강하게 부각시키면 완성도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대상 당선작 ‘에메랄드궁’은 심사위원 모두가 강하게 지지한 작품이다. 모텔을 배경으로 이합집산하는 변두리 인생을 속 깊은 눈과 맛깔난 문장으로 버무렸다.
체념적이거나 동정적 시선으로 그려내기 쉬운 주변부 인생들에게 제 몫의 욕망과 고통, 삶의 환희를 분배하고 저 스스로 움직이고 말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각 인물의 사연을 평면적 방식이 아닌, 추리적 기법으로 입체적으로 그려 재미를 더했다. 주변부적 감수성과 변두리적 자의식에 공명하는 ‘에메랄드궁’이 이룬 성취가 지금 우리 현실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깊은 애정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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