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길상사 인근 대사관저들이 즐비한 곳에 최근 눈에 뜨이는 공간 하나가 생겼다. 붉은 테두리를 가진 7m 크기의 대형 유리문이 주변 풍광을 비춰내는 모습이 이채로운 곳이다. 그 옆으론 아름드리 소나무가 꿈틀거리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높은 담벼락으로 진을 치고 있는 주변 이웃들과는 대비되는 풍경이다. 오랫동안 여성 브랜드 ‘에꼴드빠리’의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영선(66)씨가 문을 연 갤러리 ‘호감’의 모습이다.
“집의 전망만을 위해 높은 담벼락과 축대를 쌓는 것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년여에 걸쳐 돌을 쪼아내고 주차장과 2개 층의 공간을 만든 뒤, 그 위에 생활공간을 올려놓았지요.”
거실에선 1년 내내 소나무 가지에 걸친 일출광경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이름도 그래서 일출과 소나무를 볼 수 있다 해서 관일송재(觀日松齋)로 명명했다.
“빈 공간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갤러리를 열게 됐습니다. 그동안 순수미술에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영감이 안 떠오를 땐 갤러리나 미술관을 순회하며 허기진 영혼을 달래고, 아이디어를 헌팅했다. 자연스럽게 미술작품도 한두 점 사기 시작하면서 컬렉터로서의 재미도 만끽했다.
“제가 정기적으로 펼쳐왔던 패션쇼의 발상 자체가 그림을 기반으로 해서 나왔습니다. 컬러, 디테일, 새로운 소재 등 미술에서 영감을 받았지요.”
그는 수많은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남긴 명언들도 미술작품을 통해서 나름대로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그의 뇌리에 수많은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패션은 충격이다. 디자인은 화려함과 편안함 그리고 매력과 실용성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끝없는 도전이다. 내가 파는 것은 옷이 아니라 꿈이다. 스타일이란 상상력이다. 패션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다. 무엇을 입을지 주저하게 될 때 레드를 입어라, 레드는 슬픔의 궁극적 치유제다. 블랙드레스를 입으면 절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여성의 드레스는 철조망 펜스 같아야 한다, 목적을 다하고 ‘View’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 패션은 레이블에 관한 것도 브랜드에 관한 것도 아니다, 패션은 자기 자신에서 나오는 무언가다. 심플함이 곧 가장 세련된 것이다. 스타일은 복잡한 것들을 말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의 패션 스승은 미술인 셈이다. 미술작품 앞에서 세계적 패션디자이너들과 공감하고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갤러리를 패션과 미술이 함께 소통하는 공간으로 가꿔갈 예정입니다. 한 나라의 미술 수준이 곧 그 나라의 패션수준을 그대로 말해 줍니다.” 그가 문화의 꽃으로서 미술을 중시하는 이유다.
30일까지 열리는 개관전엔 ‘포스코 스틸아트 어워드’를 수상한 리우 작가를 비롯해 12명의 작가가 참여하고 있다. 빛과 조명을 이용한 시각적 환상을 보여주는 권용래·박진원, 전통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도드라진 석철주·최영욱, 일상 소재와 풍경의 내면을 보여주는 고진한·이만나 등이 서로 대립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왕관과 옥좌의 이미지와 유리병을 통해 영광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조광필·최경문 작가의 작품도 출품됐다. 200평 규모의 갤러리는 두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세미나, 공연, 파티도 가능하게 부대 시설도 갖췄다.
패션디자이너 이영선이 걸어온 길은 바로 한국패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디자이너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에 일찍이 그는 의상실을 열어 패션의 길로 들어섰다. 집안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저희 가족은 평양에서 1·4후퇴 때 피난을 나왔어요.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전쟁이 터지자 귀국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서울로 내려왔지요.”
부친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내공업으로 양말과 스웨터를 짜 평화시장에 내다 팔았다. 나중엔 당시 인기 만점이었던 나일론 양말을 생산하는 자그마한 공장까지 운영하게 됐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로 보고 배운 일이다.
“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양말 짜고 실 뽑고 염색하는 ‘섬유풍경’ 속에서 살았어요. 간혹 다림질과 재단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종로에 의상실을 연다. 결혼예복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의상실은 번창했다. 하지만 1975년 일본에 간 그는 충격을 받는다. 이미 사이즈별 기성복시대가 만개한 모습에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는 종로에서 명동으로 의상실을 옮긴다. 명동 중심가에 양장점이 대거 들어서던 시절이다. 때마침 생긴 코스모스백화점에서 입점 제의를 받아, ‘맨스클럽’이란 브랜드로 사파리 점퍼 등 남자 기성복을 론칭시켰다.
1979년 본격적인 대형백화점인 롯데백화점이 생기면서 패션시장은 대중화의 계기를 맞는다. 그는 ‘롯데오리지날’ 여성복 브랜드로 롯데백화점에 납품했다. 1981년부터는 여성복 브랜드 ‘에꼴드빠리’의 패션디자이너로 본격 활동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경기가 좋아 백화점 전성시대였지요. 롯데백화점에 돌을 갖다 놓아도 팔린다 할 정도였습니다.”
1990년도 중반부턴 아웃렛이 생기면서 패션시장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캐주얼브랜드가 등장한 것이다. 그도 캐주얼브랜드 ‘클럽코코아’를 론칭시켰다. 중국까지 진출했다.
“땅덩어리가 큰 중국은 하나의 브랜드로 커버하기가 힘든 나라입니다. 상하이 시민들은 체격이 남방계답게 베이징에 비해 작고, 더위로 캐주얼풍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류인프라와 관리조직도 한국에 비해 열악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역마다 전략이 달라야 하니 작은 회사들은 감당하기 힘들지요.” 그도 결국엔 중국에서 철수했다.
2011년 이후엔 패션시장이 다변화되면서 수익성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홈쇼핑, 인터넷 쇼핑 비중이 50%에 달하면서 백화점에만 의존하는 사업에 한계가 왔다.
“대기업과 수입브랜드에 치이고 시장의 급변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일선 디자이너 일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젠 오랜 노하우를 후배들과 공유하고 뒤에서 후원하는 것이 패션계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스포츠댄스를 즐길 정도로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가 대한패션디자인협회 회장을 연임해서 맡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02)762-3322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집의 전망만을 위해 높은 담벼락과 축대를 쌓는 것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년여에 걸쳐 돌을 쪼아내고 주차장과 2개 층의 공간을 만든 뒤, 그 위에 생활공간을 올려놓았지요.”
거실에선 1년 내내 소나무 가지에 걸친 일출광경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이름도 그래서 일출과 소나무를 볼 수 있다 해서 관일송재(觀日松齋)로 명명했다.
“빈 공간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갤러리를 열게 됐습니다. 그동안 순수미술에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영감이 안 떠오를 땐 갤러리나 미술관을 순회하며 허기진 영혼을 달래고, 아이디어를 헌팅했다. 자연스럽게 미술작품도 한두 점 사기 시작하면서 컬렉터로서의 재미도 만끽했다.
“제가 정기적으로 펼쳐왔던 패션쇼의 발상 자체가 그림을 기반으로 해서 나왔습니다. 컬러, 디테일, 새로운 소재 등 미술에서 영감을 받았지요.”
그의 패션 스승은 미술인 셈이다. 미술작품 앞에서 세계적 패션디자이너들과 공감하고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갤러리를 패션과 미술이 함께 소통하는 공간으로 가꿔갈 예정입니다. 한 나라의 미술 수준이 곧 그 나라의 패션수준을 그대로 말해 줍니다.” 그가 문화의 꽃으로서 미술을 중시하는 이유다.
30일까지 열리는 개관전엔 ‘포스코 스틸아트 어워드’를 수상한 리우 작가를 비롯해 12명의 작가가 참여하고 있다. 빛과 조명을 이용한 시각적 환상을 보여주는 권용래·박진원, 전통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도드라진 석철주·최영욱, 일상 소재와 풍경의 내면을 보여주는 고진한·이만나 등이 서로 대립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왕관과 옥좌의 이미지와 유리병을 통해 영광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조광필·최경문 작가의 작품도 출품됐다. 200평 규모의 갤러리는 두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세미나, 공연, 파티도 가능하게 부대 시설도 갖췄다.
패션디자이너 이영선이 걸어온 길은 바로 한국패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디자이너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에 일찍이 그는 의상실을 열어 패션의 길로 들어섰다. 집안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저희 가족은 평양에서 1·4후퇴 때 피난을 나왔어요.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전쟁이 터지자 귀국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서울로 내려왔지요.”
부친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내공업으로 양말과 스웨터를 짜 평화시장에 내다 팔았다. 나중엔 당시 인기 만점이었던 나일론 양말을 생산하는 자그마한 공장까지 운영하게 됐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로 보고 배운 일이다.
“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양말 짜고 실 뽑고 염색하는 ‘섬유풍경’ 속에서 살았어요. 간혹 다림질과 재단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종로에 의상실을 연다. 결혼예복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의상실은 번창했다. 하지만 1975년 일본에 간 그는 충격을 받는다. 이미 사이즈별 기성복시대가 만개한 모습에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는 종로에서 명동으로 의상실을 옮긴다. 명동 중심가에 양장점이 대거 들어서던 시절이다. 때마침 생긴 코스모스백화점에서 입점 제의를 받아, ‘맨스클럽’이란 브랜드로 사파리 점퍼 등 남자 기성복을 론칭시켰다.
외부 풍경을 은은히 비추는 갤러리 문 앞에 선 이영선씨. 그는 “갤러리 공간이 작가와 디자이너가 협업해 새로운 창작세계를 연출하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경기가 좋아 백화점 전성시대였지요. 롯데백화점에 돌을 갖다 놓아도 팔린다 할 정도였습니다.”
1990년도 중반부턴 아웃렛이 생기면서 패션시장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캐주얼브랜드가 등장한 것이다. 그도 캐주얼브랜드 ‘클럽코코아’를 론칭시켰다. 중국까지 진출했다.
“땅덩어리가 큰 중국은 하나의 브랜드로 커버하기가 힘든 나라입니다. 상하이 시민들은 체격이 남방계답게 베이징에 비해 작고, 더위로 캐주얼풍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류인프라와 관리조직도 한국에 비해 열악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역마다 전략이 달라야 하니 작은 회사들은 감당하기 힘들지요.” 그도 결국엔 중국에서 철수했다.
2011년 이후엔 패션시장이 다변화되면서 수익성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홈쇼핑, 인터넷 쇼핑 비중이 50%에 달하면서 백화점에만 의존하는 사업에 한계가 왔다.
“대기업과 수입브랜드에 치이고 시장의 급변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일선 디자이너 일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젠 오랜 노하우를 후배들과 공유하고 뒤에서 후원하는 것이 패션계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스포츠댄스를 즐길 정도로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가 대한패션디자인협회 회장을 연임해서 맡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02)762-3322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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