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 평생 헌신한 남아공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가장 사랑받은 정치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94)이 5일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말처럼 그의 희망은 이뤄졌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정치범으로 27년의 옥살이, 남아공 사상 최초 흑인 대통령, 인종차별과 갈등과 싸워 온 노벨평화상 수상자, 만델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조명해보았다.
▲ 인종차별과 싸운 투사
지난 1918년 만델라는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族)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델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영국식 이름인 '넬슨'과 그의 부친이 지어준 아프리카 이름인 '롤리흘라흘라'이다.
혈기왕성했던 만델라는 지난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했고, 그 다음해 요하네스버그로 갔으며 1943년부터는 위트워터즈랜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여러 가지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이 시기 만난 사람들의 그가 정치적인 지도자로 자라날 수 있는데 큰 영감과 힘을 준 사람들이다. 그러던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연맹을 창설했다.
법학 학위를 받고 변호자 자격을 얻은 만델라는 1952년 동료 올리버 탐보와 함께 비백인(非白人)으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이후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을 뜻하는 아프리칸스어)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참가했고 1956년에는 반역죄로 155명의 인권 운동가와 함께 체포됐다. 1960년 3월 69명의 흑인이 경찰에 살해된 '샤프빌 흑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1962년 다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64년에는 범죄 혐의 추가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27년 옥살이한 최초 흑인 대통령
1964~1990년 27년 동안을 교도소에서 보낸 뒤 73세의 노인이 돼서 자유를 얻었고, 오랜 투옥 생활은 성숙된 지도자로 거듭 나게 했다.
1980년대 망명 중인 탐보는 만델라 석방 운동을 벌였고, 결국 1990년 당시 대통령이던 FW. 드 클레르크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됐다.
1994년 4월27일 실시된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ANC는 의회 400석 가운데 252석, 62%를 득표했고 ANC 지도자인 만델라는 5월27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했고, 향후 각 국의 과거사 진상 규명의 모델이 됐다.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화형,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라도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했고,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 노벨 평화상 수상자와 에이즈 퇴치 자선 운동
1993년 12월 만델라는 드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만델라는 이후 당시 자신이 무장투쟁한 경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추억하기도 했다.
흑백 분리를 강력하게 추진한 PW 보타 대통령의 뒤를 이어 취임한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해체하는데 공헌이 있었다. 1990년 불법단체로 규정됐던 ANC 등 단체에 대한 금지 조치를 헤재하고 만델라를 석방했던 대통령이다.
대통령에 취임하던 1994년 만델라는 77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4년의 재임 기간 뒤 그는 대통령 직을 자신이 점찍은 후임에게 남겨주고 당시 남아공의 가장 큰 문제였던 에이즈와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만델라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자선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2005년에는 비밀로 부쳐졌던 장남 마가토 만델라의 죽음의 원인이 에이즈라고 밝히면서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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