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터 시은미, 정지윤의 부담감 너무나 공감, 잘 할것"
지난 시즌 창단 2년 만에 여자 프로배구 챔피언에 오른 IBK기업은행이 올해도 독주를 거듭하고 있다. 14일 현재 8승2패, 승점 23으로 경쟁팀들과의 승점차를 넉넉히 벌리고 있다.
IBK기업은행의 독주를 막아설 0순위로 꼽혔던 팀은 지난 시즌 IBK기업은행에 아쉽게 우승컵을 내준 GS칼텍스였다. 정대영(32), 한송이(29) 등 베테랑 공격수들과 어느덧 중견이 된 배유나(24), 여기에 지난 시즌 신인왕에 빛나는 이소영(20)까지. 신·구조화를 잘 이룬 공격진은 여느 팀과도 견줘도 앞서면 앞섰지, 뒤질 것이 없다. 그러나 GS칼텍스의 현재 성적은 6승4패, 승점 17로 2위를 지키고 있지만, IBK기업은행과의 격차는 커 보인다.
GS칼텍스의 예상외 부진 이유로는 세터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지난해 GS칼텍스의 공격을 조율했던 이숙자(33)와 이나연(21) 세터는 올 시즌 GS칼텍스 코트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나연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 임의탈퇴 처리됐고, 이숙자는 올 여름 컵 대회에서 아킬레스건을 다치고 말았다. 그 결과 제 3의 세터였던 시은미를 주전으로 낙점했으나 시즌 초반 흔들리면서, 실업팀 양산시청에서 뛰고 있던 정지윤(33)을 긴급수혈했다. ‘세터 놀음’이라고 불리는 배구에서 세터가 바뀌었다는 것은 팀 컬러 자체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어버린 14일, GS칼텍스와 현대건설의 경기가 열린 평택 이충문화체육관에서 경기 전 이숙자 세터를 만나 최근의 근황과 코트에서 뛰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 심경을 들어봤다.
GS칼텍스의 경기를 지켜보는 팬이라면, 이숙자가 팀의 모든 경기를 따라다니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에 대해 묻자 “감독님이 코트에서는 뛰지 못하지만, 경기를 직접 보며 감각을 잃지 않아야 하지않느냐고 하시더라구요. 거기에 (시)은미의 조언도 부탁하셔서 그렇죠”라며 대답했다.
이숙자의 재활 생활은 어떨까. “다행이 트레이너님들이 재활 속도나 경과가 좋다고 하더라구요. 러닝훈련도 하고 있고, 벽에다 토스 연습도 하긴 하는데, 그래도 무리는 금물이라서 복귀는 아직 멀었죠. 아마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면 그때쯤 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해만 해도 GS칼텍스는 용병 의존도가 가장 낮은 팀 중 하나였다. 한송이와 이소영 등 토종 공격수들이 뛰어난 공격력을 자랑하는 데다 특히 정대영과 배유나 등 센터진의 이동 공격은 GS칼텍스의 주요 공격 루트였다. 그러나 올 시즌엔 베띠 의존도가 심해진 모습이다. 이에 대해 이숙자는 “이동공격과 같은 세트 플레이는 세터와의 호흡이 중요해요. 저랑 거의 15~16년 맞춰온 (정)대영이랑도 안 맞는 날에는 안 맞는데, 지금 세터진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더욱 그럴꺼에요”라면서 “공격수와 세터는 서로 간의 믿음도 중요해요. 세터 입장에서는 포인트가 확실히 날 수 있는 쪽으로 올려줄 수밖에 없고, 공격수도 세터를 믿고 준비 동작을 해야 하거든요. 지금 주전으로 뛰고 있는 (정)지윤이와 공격수들이 믿음을 쌓아가는 단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 맞을 거에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정)대영이가 지난해에 비해 득점력이 떨어졌거든요. 그래서 종종 제게 와서 쿡쿡 찌르며 ‘언니 빨리 복귀해’라고 압박을 주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무리하면 안 된다고 잘 챙겨줘요”라고 일화를 들려줬다.
세터는 기량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이 필요하다. 팀을 조율하는 세터가 흔들린다면, 팀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세터인 이숙자가 생각하는 세터의 멘탈은 어떨까. “생각해보면 세터라는 포지션이 참 빛이 나지 않는 포지션이죠. 24-24에서 과감하게 속공을 성공시키면 찬사가 돌아오지면, 막히면 돌아오는 욕이 엄청나죠. 아마 (시)은미가 시즌 초반에 흔들린 것도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 거에요”라면서 “저는 현대 시절 7년차가 되어서야 주전으로 뛸 수 있었어요. 첫 시즌에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힘들었죠. (시)은미가 시즌 초반에 저한테 와서 ‘언니가 이런 심정이었냐’고 물어봤을 때,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었죠”
부상 회복하고 돌아왔을 때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는 것에 대한 조바심은 없을까. 이숙자는 웃으며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는 7년차 때야 주전으로 뛰었고, 이후엔 잘 풀려서 국가대표까지 하는 등 산전수전 다 겪었거든요. 지금은 천천히 재활에 매진해서 플레이오프에서 뛸 수 있는 몸상태를 만드는게 우선이죠. 그때도 주전은 (정)지윤이겠지만, 지윤이가 흔들릴 때 원포인트로 들어가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역할을 해내야 겠죠”
이숙자와 정지윤은 동갑내기 친구다. 동갑내기 친구는 가장 편한 사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껄끄러울 수도 있는 관계가 바로 친구다. 코트 밖에서 지켜보면서 느끼는 점을 조언하는 데 있어서 부담이 되진 않을까. 이에 대해 묻자 “저도 처음엔 (정)지윤이가 부담을 느낄까봐 조심스러웠는데, 지윤이가 먼저 다가와 이럴 땐 어떤 게 나을까 등 물어보더라구요. 경기 때 싸인도 보내달라고 할 정도니 이제 서로 편하게 터놓고 배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래요”라면서 “아마 지윤이가 실업팀에서 뛰다가 와서 힘든가봐요. 숙소 앞에 한약이 와 있더라구요. 그래도 지윤이가 프로에 뛰던 시절엔 꼴찌를 전전하던 시절이라 요즘엔 많이 이겨서 즐겁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열심히 해서 올해 같이 우승하자고 약속했어요. 내년엔 다시 양산시청으로 돌아간다고 하던데, 같이 뛰고 싶은 마음이에요”라고 대답했다.
프로배구 출범 10년째지만, 아직도 리그를 호령하는 세터는 이효희(IBK기업은행), 이숙자 등 프로 출범 전부터 활약했던 베테랑들이다. 세터 기근이 심각한 수준이다. 이에 대해 묻자 “선배 언니들의 딸들이 벌써 중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데, 들어보니 빛이 별로 안 나는 세터보다는 공격수들을 선호한다고 하더라구요. 뿐만 아니라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시절엔 졸업생이 100명 정도였는데, 요즘은 그 절반도 못 미치죠. 학원 배구가 많이 줄어든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이숙자는 비록 경기에 뛰지는 못하지만, 선수단과 함께 생활하며 함께 이동하고 코트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GS칼텍스 선수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이숙자가 언제쯤 부상에서 회복해 다시 코트를 호령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돌아온 GS칼텍스는 훨씬 강해진다는 점이다.
평택=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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