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 공포와 함께 환청·불면증도 3년에 한 번꼴로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하면서 닭과 오리 살처분에 동원되는 공무원들이 ‘AI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24일 전북도에 따르면 17일 고창군에서 AI가 발생한 이후 매일 공무원 100∼150명이 투입돼 오리 27만마리를 살처분했다. 이날 오전 고창군 해리 일대 농장에서도 공무원 100여명이 동원돼 오리 1만8000마리의 살처분 작업이 진행됐다. 하얀색 방역 작업복을 입은 공무원들은 축산직 공무원의 지휘에 따라 비닐 속에 오리 100여 마리씩을 넣은 후 가스를 주입해 질식사 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살처분 작업은 이날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계속됐다.
살처분 작업이 장기화되면서 담당 공무원들이 피로 누적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또 살처분 현장에 투입되기 전 예방백신을 접종하고 일주일간 타미플루를 복용하지만 AI 감염 공포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
이날 살처분을 감독한 고창군 이동태 축산진흥계장은 “일주일째 이런 일을 하다보니 오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며 “살처분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아 우울해진다”고 말했다.
가금류 사육이 많은 전남·북 지역에서는 2003년과 2008년, 2011년, 2014년 등 모두 4차례 AI가 발생해 살처분하는 홍역을 치렀다. AI가 발생할 때마다 매번 수십만마리의 살처분 작업에 동원된 공무원의 ‘AI 트라우마’가 쌓여가고 있다. 축산 관련 공무원들은 AI 발생부터 종료 때까지 줄곧 살처분 작업장을 지켜야 해 고통의 정도가 심하다. 일반 공무원들도 AI 방역 기간에 두세 차례 살처분에 투입되면 살아있는 동물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AI 방역 업무를 맡고 있는 전남 나주시 이경식(53) 축산방역팀장은 최근 고창에서 발생한 AI로 그동안 잊혀진 줄 알았던 3년 전 악몽이 되살아나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그는 요즘 “자신이 매장한 오리들이 살려 달라는 아우성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업무를 보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고창=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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