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말하자면 아버지로부터 내려받은 DNA 이력이 찬란하다. 구척장신에다 잘생긴 아버지,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온 식자였다. 첫 번째는 징용으로, 두 번째는 스스로 돈을 벌러 다녀왔는데 면사무소 직원이 모르는 한자를 묻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다닐 정도였다. 아버지는 어정쩡하게 농사에도, 지식인으로서도 안착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한세상 살다 갔다. 아버지의 술시중을 받아내던 어머니가 먼저 쓰러지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열 살 아래 막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큰형은 아버지와 싸우고 호적을 파서 사라졌고 누나는 대전으로 식모살이 떠났으며 작은형도 대처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열네 살 중학생 유용주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젖먹이 막내를 돌볼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한 푼이라도 벌어 어머니 병구완에 보태야 했다.
수분령은 전북 장수에서 금강과 섬진강으로 물길이 달라지는 경계점이다.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가면 섬진강인 분기점인 그 고개 아래 유용주의 고향 집이 있다. 장수읍내에서 점심을 마치고 수분령을 넘어 당도한 그 집은 높고 쓸쓸했다. 해발 500m가 넘는 지대에 더 이상 올라갈 곳이 보이지 않는 가장 높은 집이었다. 유용주는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낼 때 직접 호랑이의 헤드라이트 같은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뻥’이 아니냐고 수차례 확인했지만 그이는 진지하게 절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유용주가 펴내게 된 ‘시문집’ 사연은 독특하다. 사진작가 전재원씨가 생태운동을 하는 출판사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일행과 취재차 내려와 시를 모티브로 사진을 찍어 책을 내고 싶은데 상업적으로 여의치 않아 대부분 거절당했다고 말했단다. 유용주가 이를 수용해 만들어진 책이 시문집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장수 산골의 사계와 이전에 펴낸 책들에서 뽑아낸 잠언 같은 자연과의 교감을 수록한 시 같은 산문, 한국판 ‘월든’이다.
“최고의 문장가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시나 소설을 통틀어 최고의 문장을 쓰고 싶어요. 그런 문장이란 집중된 삶에서 옵니다. 이곳은 온전히 내 자세에 집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픔을 들여다보고 살아야 하는데, 이제는 불화와 상처가 지겹습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할 때라고 판단한 거죠. 대인은 저자에 숨고 소인은 산속에 숨는다던데 그렇게 보자면 나는 대단한 소인일지도 모릅니다. 집중된 삶이 절실했습니다.”
그는 서산에서는 20여년 동안 7권 넘는 책들을 펴내 더 이상 뽑아낼 이야기가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다. 게다가 사방에서 짖어대는 개들의 목청 때문에 버티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그 고통은 ‘개보다 못한 시인’으로까지 산출됐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겹쳐 그가 전북 장수, 옛 고향에 돌아온 뒤 일상은 ‘걷는 자’의 이미지였다. 하늘 아래 첫 집, 고개 위 끝집에서 새벽 4∼5시에 일어나 수분령 휴게소에 차를 세워놓고 그는 3∼4시간 걸려 산길이나 강변길로 장수읍내까지 걸어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난 뒤 군내버스를 타고 수분령에 이르러 집으로 돌아온 뒤 그날 깨알같이 머릿속에 입력한 풍광과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쓴 시들 중 하나, 이렇게 흐른다.
“높은깎음으로 올라가는 들머리/ 왕소나무가 서서 열반에 들었다// 어렸을 적,/ 저 나무 위에서 부엉이가 울면/ 부엉이 아래에는 호랭이가/ 시퍼렇게 불을 켜고 앉아있었다// 칙간까지 걸어가지 못해/ 마당 한 귀퉁이 밤똥을 눌 때/ 오금 저리게 했던 개호주 울음소리와/ 암자로 올라가는 길은 끊어졌다”(‘끈’ 부분)
금강과 섬진강이 나뉘는 수분령(水分嶺)에 선 유용주 시인. 그는 전북 장수 수분령 아래 옛 고향에 돌아와 걷고 또 걷고, 쓰고 또 쓰는 수도승처럼 살고 있다. |
유용주는 “사사로운 이익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시를 대하는 태도가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메꾸려고 기교가 승하게 되니까 참말과는 멀어진다”면서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선하고 어진 마음이 아닌가”라고 그날 말했다. 그는 “청빈은 거지처럼 사는 거나 산속에서 가난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능히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 한 선배의 말을 상기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기를 소망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세속의 마음과 이를 성찰하는 부끄러움이 늘 길항한다”고 고백했다.
수분령 아래 시인의 높고 외딴 집을 내려와 우리는 장수읍내 노래방에 들렀다. 시인의 방에서 들었던 배호의 여운에 붙들려서였다. 그날 장수읍내 노래방에서 시인은 전인권의 ‘새야’를 불렀다. 시인은 폭발 직전의 거대한 공명통을 울려 터질 듯한 슬픔을 토해냈다. 집중된 삶을 위해 세상과의 불화를 피해 옛집을 찾아왔다는 유용주. 그는 상처 자욱한 고향의 산과 강을 걷고 걷는 문장의 수도승 같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