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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전북 장수에 내려가 시문집 낸 유용주 시인

입력 : 2014-02-03 20:42:21 수정 : 2014-02-03 22: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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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된 삶이 절실해 고향행… 평생 썼던 시의 두배는 더 썼어요” 수분령 아래 시인의 외딴집에 배호(1942∼1971)가 부르는 ‘울고 싶어’가 흘렀다. 시인은 거구를 느리게 흔들며 그 노래에 맞추어 희랍인 조르바처럼 춤을 추었다. 그 누가 그 사랑을 앗아가 버렸는지 못 견디게 아픈 마음 소리치며 울고 싶네 내리는 빗소리는 슬픔의 눈물인가 이 마음 누가 아랴 어쩐지 울고만 싶네 아무리 흐느끼며 울어도 소용없는 이 마음 누가 아랴, 어쩐지 울고만 싶어…. 1절과 2절 사이는 깊은 색소폰 소리가 메꾸었다. 서울에서 내려와 장수읍내에서 점심 반주를 한 뒤 시인의 집에 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다시 술이 빠지지 않았으니 취기가 웬만큼 오른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말술에도 끄떡 않는 유용주(56) 시인이 몇 잔 술 때문에 저리 흥이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술로 말하자면 아버지로부터 내려받은 DNA 이력이 찬란하다. 구척장신에다 잘생긴 아버지,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온 식자였다. 첫 번째는 징용으로, 두 번째는 스스로 돈을 벌러 다녀왔는데 면사무소 직원이 모르는 한자를 묻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다닐 정도였다. 아버지는 어정쩡하게 농사에도, 지식인으로서도 안착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한세상 살다 갔다. 아버지의 술시중을 받아내던 어머니가 먼저 쓰러지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열 살 아래 막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큰형은 아버지와 싸우고 호적을 파서 사라졌고 누나는 대전으로 식모살이 떠났으며 작은형도 대처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열네 살 중학생 유용주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젖먹이 막내를 돌볼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한 푼이라도 벌어 어머니 병구완에 보태야 했다. 

그가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서문에 쓴 “공부랍시고 책을 가까이 해본 적은 야간 검정고시 학원을 다닐 때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했던 국정교과서를 덮은 것이 마지막이었고, 고금과 소총을 아울러 오로지 현장이 표지였고 중국집 배달통이 제목이었으며 접시닦이와 칼판이 차례였고 제빵공장 화부와 도넛부의 펄펄 끓는 기름솥이 서문이었으리라”가 후일의 삶을 웅변한다. 그는 야학을 다니며 시에 끌리다 1991년 ‘창작과비평’에 이른바 목수 시인으로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무렵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김선희(48)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단칸 셋방에서 시작해 스머프집 같은 누옥을 차지해 충남 서산에서 24년째 살았다. 그가 2년 전 아버지가 빚에 넘겼던 집터를 사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첩첩산골, 신무산 자락 끝집에 작은 집을 짓고 오롯이 글을 쓰기 위해 머무르는 그곳에서 펴낸 첫 책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을 붙들고 그이를 찾아갔다.

수분령은 전북 장수에서 금강과 섬진강으로 물길이 달라지는 경계점이다.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가면 섬진강인 분기점인 그 고개 아래 유용주의 고향 집이 있다. 장수읍내에서 점심을 마치고 수분령을 넘어 당도한 그 집은 높고 쓸쓸했다. 해발 500m가 넘는 지대에 더 이상 올라갈 곳이 보이지 않는 가장 높은 집이었다. 유용주는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낼 때 직접 호랑이의 헤드라이트 같은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뻥’이 아니냐고 수차례 확인했지만 그이는 진지하게 절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유용주가 펴내게 된 ‘시문집’ 사연은 독특하다. 사진작가 전재원씨가 생태운동을 하는 출판사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일행과 취재차 내려와 시를 모티브로 사진을 찍어 책을 내고 싶은데 상업적으로 여의치 않아 대부분 거절당했다고 말했단다. 유용주가 이를 수용해 만들어진 책이 시문집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장수 산골의 사계와 이전에 펴낸 책들에서 뽑아낸 잠언 같은 자연과의 교감을 수록한 시 같은 산문, 한국판 ‘월든’이다.

“최고의 문장가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시나 소설을 통틀어 최고의 문장을 쓰고 싶어요. 그런 문장이란 집중된 삶에서 옵니다. 이곳은 온전히 내 자세에 집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픔을 들여다보고 살아야 하는데, 이제는 불화와 상처가 지겹습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할 때라고 판단한 거죠. 대인은 저자에 숨고 소인은 산속에 숨는다던데 그렇게 보자면 나는 대단한 소인일지도 모릅니다. 집중된 삶이 절실했습니다.”

그는 서산에서는 20여년 동안 7권 넘는 책들을 펴내 더 이상 뽑아낼 이야기가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다. 게다가 사방에서 짖어대는 개들의 목청 때문에 버티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그 고통은 ‘개보다 못한 시인’으로까지 산출됐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겹쳐 그가 전북 장수, 옛 고향에 돌아온 뒤 일상은 ‘걷는 자’의 이미지였다. 하늘 아래 첫 집, 고개 위 끝집에서 새벽 4∼5시에 일어나 수분령 휴게소에 차를 세워놓고 그는 3∼4시간 걸려 산길이나 강변길로 장수읍내까지 걸어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난 뒤 군내버스를 타고 수분령에 이르러 집으로 돌아온 뒤 그날 깨알같이 머릿속에 입력한 풍광과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쓴 시들 중 하나, 이렇게 흐른다.

“높은깎음으로 올라가는 들머리/ 왕소나무가 서서 열반에 들었다// 어렸을 적,/ 저 나무 위에서 부엉이가 울면/ 부엉이 아래에는 호랭이가/ 시퍼렇게 불을 켜고 앉아있었다// 칙간까지 걸어가지 못해/ 마당 한 귀퉁이 밤똥을 눌 때/ 오금 저리게 했던 개호주 울음소리와/ 암자로 올라가는 길은 끊어졌다”(‘끈’ 부분)

금강과 섬진강이 나뉘는 수분령(水分嶺)에 선 유용주 시인. 그는 전북 장수 수분령 아래 옛 고향에 돌아와 걷고 또 걷고, 쓰고 또 쓰는 수도승처럼 살고 있다.
진짜로 시에서처럼 유용주는 어린 시절 변소를 가다가 호랑이가 헤드라이트처럼 눈을 밝히고 지척까지 내려온 걸 보았다고 했다. 멧돼지나 고라니, 오소리나 담비의 눈빛과는 분명 달랐단다. 학교 가는 길에 모퉁이 서 있던 곰을 직접 본 적도 있다. 귀 달린 뱀, 청사, 홍사, 백사도 함께 등교하던 아이들과 보았고 심지어 목에 걸치고 다니기도 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줘서 섭섭했단다. 유용주는 고향에 들어와 평생 썼던 시의 두 배는 더 썼다고 했다. 그 시편 몇 편을 받아 읽어보니 과연 높고 외로운 시향이 좋다. 새벽에 산길 물길 걷고 걸어 옛 고향 소읍에 들어 놀다가 고개 아래 돌아가 쓰고 또 쓰는 간단하면서도 가멸찬 삶의 소득이다.

유용주는 “사사로운 이익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시를 대하는 태도가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메꾸려고 기교가 승하게 되니까 참말과는 멀어진다”면서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선하고 어진 마음이 아닌가”라고 그날 말했다. 그는 “청빈은 거지처럼 사는 거나 산속에서 가난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능히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 한 선배의 말을 상기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기를 소망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세속의 마음과 이를 성찰하는 부끄러움이 늘 길항한다”고 고백했다.

수분령 아래 시인의 높고 외딴 집을 내려와 우리는 장수읍내 노래방에 들렀다. 시인의 방에서 들었던 배호의 여운에 붙들려서였다. 그날 장수읍내 노래방에서 시인은 전인권의 ‘새야’를 불렀다. 시인은 폭발 직전의 거대한 공명통을 울려 터질 듯한 슬픔을 토해냈다. 집중된 삶을 위해 세상과의 불화를 피해 옛집을 찾아왔다는 유용주. 그는 상처 자욱한 고향의 산과 강을 걷고 걷는 문장의 수도승 같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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