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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건축 도면은 ‘원형복원의 열쇠’

입력 : 2014-02-05 21:00:54 수정 : 2014-02-05 21: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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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연구소 18∼20세기 초 제작 42건 연구 ‘구중심처(九重深處)’, 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깊은 곳이란 뜻이니 궁궐을 일컫는 말이다. 왕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의 상징적 존엄성과 심리적 거리감을 의미하지만, 말 그대로 궁궐의 구조적 복잡성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의 지금 모습은 ‘아홉 겹’이라고 하기엔 헛헛한 구석이 있다. 전각이 있었던 자리가 빈터로만 남은 데가 곳곳에 있어서다. 당대 최고의 기술자와 재료를 동원한 최고의 건축물인 궁궐의 진면모는 어땠을까. 조선 왕실의 도면은 이런 상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자료다. 도면이 있어서 궁궐의 복원도 가능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왕실의 도면 42건 60매를 정리, 연구한 결과를 보면 시대에 따른 궁궐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도면에 나타난 왕조시대의 종말

연구소가 정리한 왕실의 도면은 궁궐, 궁가(宮家·왕실의 친인척이 살던 건물) 등을 표현한 것으로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제작된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 긴 역사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던 즈음이고,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기다. 왕실 도면, 특히 궁궐의 도면에는 이런 시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궁궐의 도면은 대개 전체도였다. 건물의 전반적인 배치, 궁궐 전경을 평면적인 형태로 한 화면에 그려냈다. 경복궁의 조감도인 ‘북궐도형’ 같은 것들이다. 전체도에는 궁궐 조성에 투영된 철학과 방향성 등의 표현이 중시됐다. 이번에 소개된 19세기 후반의 ‘경복궁 교태전 도형’, ‘경복궁 통화당 도형’, ‘창경궁 통화전 도형’ 등은 개별 건물의 도면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지금까지는 ‘창덕궁 도형’이 궁궐 개별 건물 도면으로 유일했다. 전체도는 이런 개별 건물 도면을 토대로 제작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왕실 도면에 변화가 보인다. 평면적인 형태이던 것이 입체적으로 바뀌어 복층의 표현, 건물 자체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구조도가 늘어난다. 입체적 구조가 중시되는 서양식 건물이 늘어나던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1910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창덕궁 내전 부속건물 시설 상세도’, 1925년의 ‘이우공가 이강공가 어별저 신축설계도’ 등에서 이런 특징이 보인다. 근대적인 형태의 도면은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던 일제가 주도해 그렸다. 여기서 일제 강점기 비정상적인 궁궐의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도 있다. 연구소 박상규 학예연구사는 “전통 건물을 유지시킨 상태에서 서양식 건물을 추가하는 게 정상적인 방식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 문화적인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비정상적이고 급격한 왕실 건축의 변화가 있었고, 이것이 도면에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왕실 도면의 일반 공개 혹은 연구자료 활용도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시대 왕실의 도면은 일급 기밀이었다. 침전, 집무실 등의 위치를 보여주는 도면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은 경호 문제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관청이나 왕실 내부에서 수리, 증축 등을 대비해 관리, 활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왕조가 몰락하면서 일제는 왕실 도면을 연구 자료로 활용했다. 광복 이후에는 민간에 공개되기에 이른다. 

전통적인 왕실 건축 도면은 대체로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를 보여주는 형태가 많다. 창경궁, 창덕궁 전체를 조감한 동궐도(①) 같은 형식이 도면으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5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도면에는 이와 달리 ‘창경궁 통화전 도형(②)’처럼 특정 건물의 모습을 표현했다. 평면적인 형태를 띠던 도면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 근대적인 건축기술이 도입되면서 ‘이우공가 이강공가 어별저 신축설계도(③)’처럼 입체적인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세계일보 자료사진
◆궁궐 복원의 1차 자료


건물의 기둥이 몇 개고, 몇 칸으로 지어졌는지를 제아무리 뛰어난 글로 묘사해도 도면 한 장만 못하다. 도면을 통하면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건물의 수치, 구조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도면이 왕실 건축을 이해하는 1차 사료로서 가지는 중요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연구소의 42개 도면은 방, 마루, 부엌 등의 배치뿐만 아니라 주변 건물의 위치까지 포함하고 있다. 특정 건물의 변화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머물렀던 순화궁의 도면이 그렇다. ‘순화궁 도형’은 1908∼11년 서소문에 있을 당시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재동 순화궁 도형’은 재동으로 옮긴 이후를, ‘재동궁 도형’은 이를 증축한 것을 표현했다. 순화궁의 최초 모습을 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도면까지 합치면 순화궁의 변천과정이 일목요연해진다. ‘운현궁구도’, ‘운현궁구도형’은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이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도면이다.

이 때문에 도면은 궁궐로 대표되는 왕실 건물을 복원하는 데 1차 사료로 활용된다. 연구소, 서울대 규장각 등이 소장한 도면에다 텍스트 형태의 궁궐지나, 수리를 위해 작성한 의궤 등을 모두 동원하면 조선 후기 왕실 건축물의 원형에 상당히 근접한 복원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록 현전하는 자료가 조선 후기의 왕실 건물에 한정된 것이지만 이를 통해 건국 직후 처음 세워질 당시의 모습을 유추하는 것도 가능하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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