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건축계도 그가 세계적 건축가로 활짝 나래를 펴려는 시점에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오는 7월27일까지 그의 건축 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2003년 프랑스 파리의 기메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이타미 준, 일본의 한국건축가’전을 비롯해 이번 과천관 전시에서도 기획 조력자로 얼굴을 비친 이가 있다. 일본의 갤러리Q 대표 우에다 유조(上田雄三·63)씨다.
“이타미 준이 2010년 일본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한 후 전화로 ‘이제 시작’이라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동안 비주류로 설움을 받던 것을 일시에 날려버리게 된 것이지요.”
비로소 공공건물 건축에서 자신의 세계를 맘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사실 일본 건축계는 도쿄대와 와세다대 출신들이 막강 파워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미술관 등 공공건물의 건축은 이들이 거의 독식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타미 준의 재조명에 앞장 서고 있는 우에다 유조씨. 그는 1983년 자신의 갤러리 오픈 기념전으로 재일동포작가 곽덕준 초대전을 가진 것을 비롯해, 그동안 육근병, 전수천 등 수많은 한국작가 전시회를 열었다. 주위의 일본사람들이 재일동포가 아니냐고 물어 볼 정도로 ‘자칭 한국인’인 그의 휴대폰엔 한복저고리를 입은 손녀사진이 저장돼 있다. |
“저는 타마미술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순수미술에 대한 동경으로 재일동포작가인 곽인식의 조수로 14년간 일을 했습니다. 곽 작가의 소개로 이타미 준을 알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향사람이고 선배라 절친이 됐지요. 이우환 작가는 저희 대학 강사로 나오면서 알게 됐습니다.”
당시 이타미 준은 곽인식 작가와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사주면서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두 작가와 정신적 교류를 이어갔다. 이우환과 세키네 노부오(關根伸夫) 등 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모노하(物派)를 이끈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건축세계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타미 준도 화가를 꿈꿨지만 집안의 반대로 건축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술에 대한 동경이 컬렉션으로 이어졌고 건축에 미술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게 됐지요.”
그는 기메미술관 전시 풍경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포도호텔 전경 사진 옆에 한국민화가 걸려 있었다.
“포도송이가 꿈틀거리는 용처럼 펼쳐져 있는 한국민화였습니다. 포도 호텔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제주 오름과 전통 초가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는 이타미 준이 한국 양반문화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고 말했다. 이타미 준의 건축공간 구성과 동선이 조선 양반집 구조라는 것이다.
“이타미 준은 한국 골동품을 아침마다 보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사고가 있었던 날도 높은 곳에 있었던 골동상자를 꺼내다 넘어져 피를 계속 흘리면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부인은 출타중이라 손도 못썼지요.”
이타미 준의 작품인 바람 미술관 등은 감상하는 예술품에 가깝다. 건축에 기능이 없으니 서양의 건축적 발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동양에 의한 동양적 시각의 건축을 서양쪽으로 본격적으로 발신하려는 중요한 시점에 떠났다. 세계건축계의 큰 손실로 여기는 이유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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