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오지는 피해현황 파악도 안돼 지난 21일,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의 김덕래 가옥(강원도 문화재 자료 56호)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지붕에서 훑어내린 눈은 처마 높이로 마당에 쌓였다. 좁은 마당을 꽉 채우고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언덕같았다. 지붕의 눈을 그냥 두었다면 무게를 못 이겨 1913년에 지은 이 고택은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한 쪽에는 눈에 밀려 지붕에서 떨어진 기와가 수북했다. 피해가 확산되는 걸 막는 ‘응급조치’ 차원의 제설 작업을 하는 손길이 바빴다.
강원도의 기록적인 폭설은 문화재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주민들의 일상 생활을 위한 제설작업에 인력이 집중 투입되다 보니 문화재 보호를 위한 조치는 늦춰질 수밖에 없다. 당장 눈을 치우는 게 급하지만, 피해 상황을 조사해 수리·복구하는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위 사진)과 선교장의 폭설피해 모습. 문화재청 제공 |
조선시대 상류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선교장(중요민속자료 5호)은 기와가 지붕에 널브러져 있었고, 용마루도 곳곳이 패여 누런 속살을 흉하게 드러냈다. 밑동이 잘려 넘어진 굴뚝은 담장에 걸쳐 있는 모습이 처연했다. 선교장 인근 오죽헌(보물 165호)의 어제각을 둘러싼 담장은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조경수들은 가지가 꺾였고, 가옥 뒤편의 작은 정원을 빽빽하게 채웠던 검은빛의 대나무 역시 많이 상했다. 오죽헌 관계자는 “부러진 나무는 잘라내야 한다. 올해는 모습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눈을 어느 정도 치운 선교장, 오죽헌 같은 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김덕래 가옥처럼 자체 인력을 두고 관리할 수 없는 변두리의 고택들은 제설 작업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폭설로 인한 문화재 피해가 집중된 곳은 건물의 지붕이다. 쌓였던 눈이 흘러내리면서 지붕을 훼손시킨 것. 기와를 엉망으로 만든 것은 물론 선교장 굴뚝의 경우처럼 주변 건조물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강원도의 이번 눈은 양이 워낙 많았던 데다 물기가 많은 ‘습설’이라 피해가 더하다고 한다.
눈을 치운다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 기와 훼손으로 지붕이 침수에 노출되거나, 건물 구조 자체에 이상이 올 수도 있다. 문화재청 양동호 직영사업단장은 “눈이 녹으면서 침수가 발생하며 목재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며 “지금은 구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반드시 점검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눈 피해를 막기 위해 현대기술을 이용한 수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선교장 이강백 관장은 “강릉 지방은 해마다 30∼50㎝의 눈이 내리고, 그때마다 피해가 반복된다”며 “지역의 특성에 맞게 (전통기술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현대기술을 활용해 수리, 복원하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일단 눈을 치우는 게 급하다. 하지만 워낙 눈이 많이 온 터라 지방자치단체의 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전문 인력이 아니면 제설작업 자체가 문화재의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궁궐, 왕릉 등의 보수를 위해 운영 중인 자체 인력 40여명을 강원도에 파견한 이유다. 이들이 지방 문화재 보호를 위해 파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피해 현장을 점검한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훼손된 기와가 가장 큰 문제로 보인다. 빨리 조치를 취해 수리해야 한다”며 “(문화재청 인력 파견은)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협업을 통한 문화재 보호의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21일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에서 문화재청 직영사업단 기술자들이 기와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
폭설로 인한 문화재 피해 규모는 아직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으나 문화재청은 강원도를 비롯해 경주, 포항 등 31곳의 문화재가 기와 파손, 나무 부러짐 등의 훼손을 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북이 19곳 1억800만원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했다. 여기에는 경주 불국사, 천연기념물인 포항 북천수 등이 포함된다. 강원도에 따르면 강릉, 속초, 동해, 삼척 4개 시군 13곳(국가지정 문화재 8곳, 도지정 문화재 5곳)에서 4억9000만원(잠정치)의 피해가 발생했다. 강원도 관계자는 “산간, 오지 등 제설이 어려운 지역의 자세한 피해 현황은 확인이 어렵다”며 “한 곳당 피해액이 국비 지원기준이 모자라도 모든 피해 문화재에 대한 특별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현지 조사 등을 통해 피해 규모를 확정한 뒤 긴급 보수비를 지원할 예정이다.
강릉=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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