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제 확대 재생산
비폭력 시민행동 촉구, 금융개혁 등 대안 모색
리처드 로빈슨 지음/김병순 옮김/돌베개/4만원 |
1974년 방글라데시에서는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해 식량 생산은 오히려 이전 몇 년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왜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을까. 농지 침수로 대량 실업이 발생하고 식량 부족에 대한 공포가 커지며 식품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또 현재 채식으로는 전 세계 인구의 120%를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인구의 6분의 1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리처드 로빈슨 뉴욕주립대 인류학과 석좌교수는 신간 ‘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에서 이 같은 사실들을 적시하며 결국 굶주림의 원인은 식량 부족 때문이 아니라 ‘식량을 살 수 있는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식량의 본질은 ‘상품’이다. 식량생산은 세계가 필요로 하는 식량의 양이 얼마인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며,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이 식량을 살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는가를 중시한다. 그래서 세계가 생산할 수 있는 최대치의 식량을 생산하지도 않는다. 또 돈을 가진 사람이 어떤 식량을 원하느냐에 따라 어떤 종류의 식량을 생산하는지도 결정된다.
무역과 상품소비가 더 나은 삶을 위한 궁극적 원천이라는 믿음은 최근 수백년간 이 세계를 지배했다. 이를 통해 우리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성공을 거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평등의 확대, 환경파괴, 사회불안과 같은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저자는 결국은 이러한 문제들이 자본주의 문화 자체에 내재돼 있는 본질이 아니냐는 인식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1998년 초판을 출간한 이후 미국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이 책은 지난 해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개정증보판을 냈고, 한국어판은 이번에 처음 선보였다.
저자는 인구증가·기아·빈곤·환경파괴·인종차별·종족갈등·질병확산·테러리즘·종교분쟁 같은 전 세계적인 고질이 결국은 자본주의의 확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지적한다.
농업에 대규모 자본이 투여되고 과학기술이 적용되며 식량 생산에는 과거와 같이 많은 노동력이 필요없게 됐다. 농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점점 더 임금노동에 의존하게 되고, 고용기회가 줄고 임금이 하락하면 결국 기아의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질병 역시 마찬가지다. 198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의 확산은 여행의 증가가 주요 원인이다. 그런데 여행은 대개 관광·사업·일자리를 찾기 위한 이주·전쟁 등을 위해 이뤄지며, 이 네 가지 모두는 자본주의가 팽창하며 그 규모가 급속히 커지고 빈도가 잦아졌다.
14세기 유럽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지폐는 자본주의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는 커다란 진전이었다. 책은 기아·빈곤·환경파괴·질병확산 등 현대사회의 고질이 자본주의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돌베개 제공 |
저자가 마지막 13장에서 균열이 가기 시작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다고 꼽은 것은 부채와 이자 상환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금융체계의 구축이다. 특히 비폭력적 시민행동을 촉구하며, 금융파생상품에서 비롯된 유동화 부채의 상환 보류 등을 촉구하고 있다. 기득권층은 물론 진보적인 인사들로부터도 과격하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한 내용이다.
대안 부분은 이같이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12장까지 자본주의의 본질을 진단하고 그 부작용을 분석하는 과정은 아주 실증적이고 논리적이어서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다. 또 대학 수업 시간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엮었기 때문에 쉽고 평이한 문체로 쓰였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13개의 장이 별도의 단락처럼 구분돼 있어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고 관심 있는 주제별로 따로 읽어도 좋겠다.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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