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이 미래산업으로 떠오르면서 총성 없는 종자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각국은 식물 등 생물의 유전질을 개선해 이용가치가 더 높은 새로운 품종을 육성하는 ‘육종(育種)’에 적극 나서고 있다. 농사가 생명을 가꾸고 부를 창출하는 일로 인식되면서 국내에서도 특화된 종자를 개발하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육종가로 불리는 이들 전문가를 품종별로 만나는 기획연재를 마련한다.
국산품종 개발로 농민과 국내 딸기농업을 구한 김태일(사진·55) 충남농업기술원 논산딸기시험장장은 농민들 사이에서 딸기영웅으로 불리는 육종의 대가다. 20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세계적 수준의 국산 딸기를 개발해 외국 품종에 의존하던 국내 딸기산업에 혁명을 일으켰다. 국가적인 부의 창출은 덤이었다.
농학박사인 그는 1994년 논산딸기시험장 개청 멤버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품종 개발에 나섰다. 종자 로열티 지불을 둘러싼 전쟁이 예고된 상황에서 자생 딸기 종이 없어 일본 품종을 무단으로 재배하고 있던 국내 농업 현장에서는 국산화가 시급했다.
신품종 개발에 착수한 지 7년 만인 2002년 ‘매향’ 품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만향’, ‘설향’, ‘금향’ 4종을 개발했다. 특히 2005년 개발한 설향은 국내 딸기농사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는 일본과의 로열티를 둘러싼 딸기전쟁에서 한국의 승리를 이끈 품종이다.
지난한 노력은 매향과 설향 개발로 나타났다. 설향은 개발 당시에는 기대를 받지 못하고 자칫 사라질 운명에 놓이기도 했다. 품종 개발을 마치고 농가 실증시험을 했으나 ‘과일이 너무 무르다’며 농가들이 선호하지 않았다. 다행이 딸기 재배기술이 좋은 한 농가가 병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논산3호(설향의 시험 당시 이름)’를 계속 재배했고 물과 영양소를 과다 공급하지 않으면 기존 품종보다 재배가 쉽고 수확량이 더욱 많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설향은 2013년 기준으로 전국 딸기 재배면적의 75.4%를 차지하는 딸기농가의 효자 품종이 됐다.
2005년 우리나라 딸기농사는 일본 품종이 85.9%를 차지했으나 설향이 해마다 10%가량씩 재배율을 늘리면서 일본 품종을 밀어냈다. 김 시험장장이 개발한 설향을 개인 권리로 품종보호 대상 작물로 지정했다면 500억원이 넘는 로열티를 받았을 것이란 게 관련업계의 분석이다. 매향은 농사가 까다로워 재배면적을 크게 늘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경남 진주 특화단지에서 꾸준히 생산돼 해마다 2000만달러씩 홍콩·싱가포르의 고급시장으로 수출되고 있다.
김 시험장장은 대한민국농업과학기술대상(근정포장)을 비롯해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하며 딸기농업의 역사를 새로 쓴 살아있는 전설이 되고 있다. 그는 연구·개발을 계속하겠다는 각오를 거듭 다졌다.
“신품종 개발을 시작한 지 20년이 흘렀네요. 아직 설향을 능가하는 품종은 없지만 설향이 일본 종자와의 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최고 종자 개발을 지속하겠습니다.”
논산=김정모 기자 race121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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