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같은 음의 두 송씨가 있는데, 송나라 송(宋)과 소나무 송(松)을 쓰는 성씨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송씨는 송나라 송(宋)을 쓰는 송씨이지만, 전남 화순을 본관으로 하는 송(松)씨도 존재한다.
소나무 송(松)을 쓰는 송씨는 화순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데, 그 연원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본에서는 송본(松本, 마쓰모토)을 쓰는 성씨가 흔하고, 지명도 많이 있어서, 일본계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 2대 유리왕비(琉璃王妃)이자,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어머니로 송(松)씨가 나와 있고, 그녀가 다물국 송양(松讓)의 딸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 고대사에 없는 성씨는 아니다.
송씨(松氏)는 1975년 국세조사에서 처음 나타났고, 1985년엔 29가구로 213위였으며,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4737명으로 130위로 뛰어올랐다.
우리나라 송씨의 대부분은 송나라 송(宋)을 쓰고 있다. 송씨의 유래에 대해 실증적으로 고증된 바는 없으나, 규장각에서 발견된 여산송씨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송씨 시조는 상(商)나라(은나라) 30대 왕인 제을(帝乙)의 장자인 미자계(微子啓)인데, 왕위를 동생 신(辛)에게 빼앗겼다. 동생 신이 바로 은나라의 마지막왕이자 폭군인 주왕(紂王)이다. 주 무왕이 난을 일으켜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미자계는 상나라 백성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주 무왕이 폭군 주왕의 아들 무경을 제후로 봉하고 유민을 관리케 했으나, 다시 무경이 난을 일으켜 진압하였다. 하지만, 미자계는 무경의 난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은나라의 수도 호경에 식읍을 주어 유민들을 관리케 하였다. 미자계가 제후로 봉해진 나라가 바로 송(宋)나라였으며, 이후 70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286년에 제, 위, 초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송나라 유민들이 송(宋)씨를 성으로 쓰면서 송씨가 생겨났다.”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의 묘 |
우리나라의 송(宋)씨 유래는 당나라에서 온 호부상서 송주은(宋柱殷)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내 송씨의 도시조인 셈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온 이유는 분명치 않은데,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이 송성용(宋成龍), 송흥용(宋興龍), 송인용(宋仁龍), 송복용(宋福龍) 4형제를 두었는데, 송인용의 후손이 진천송씨가 되고, 송복용의 후손이 홍주송씨가 되었다. 또, 장자인 송성용의 둘째아들 송정열(宋正烈)의 후손은 신평송씨가 되었고, 송성용의 장자인 송흥렬에서 야성송씨(둘째 송맹영의 후손), 김해송씨(셋째 송계영의 후손)가 갈라져 나갔다.
그 송흥렬의 장자가 송주은의 10세손인 송자영(宋自英)이며, 그가 송유익(宋惟翊), 송천익(宋天翊), 송문익(宋文翊) 3형제를 두어 이들이 각각 여산송씨, 은진송씨, 서산송씨로 갈라져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송씨끼리는 본관이 달라도 서로 통혼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문헌 기록에는 본관이 172본이나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연안(延安), 야성(冶城), 청주(淸州), 신평(新平), 김해(金海), 남양(南陽) 등 10여 본이다. 그중 대부분은 여산송씨, 은진송씨, 진천송씨이다.
송(宋)씨는 조선시대에 2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9만6641가구에 총 63만43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286성 중 제18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여산송씨의 본관인 여산은 지금의 익산군 여산면으로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있다. 여산송씨의 시조는 송씨 도시조인 송주은의 11세손인 송유익(宋惟翊)이다. 그는 진사(進士)로서 공을 세워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여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여산송씨의 중시조는 송유익의 4대손인 송송례(宋松禮)이다. 그는 왕실을 위협하던 권신 임연(林衍)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익대보리(推誠翼戴輔理) 동덕좌명공신(同德佐命功臣)에 책록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시중판전리사사(門下侍中判典理司事)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아울러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고 식읍 1000호를 받았다. 이로써 여산송씨 문중의 기틀이 다져졌으므로 여산송씨 문중에서는 송송례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전북 익산 여산면에 있는 여산송씨 재실 |
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명문가의 지위를 구축했는데, 특히 지신공파와 정가공파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벼슬을 보면, 상신 2명(영의정 1명, 좌의정 1명), 왕비 1명(단종비 정순왕후),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357명인데, 그중 문과가 74명, 무과에 51명, 사마시에 229명, 음양과에 1명, 율과에 2명이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여산송씨는 7만2763가구에 총 23만27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여산송씨의 연혁과 인물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은 고려 때 나라에 공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다. 그의 4세손인 송송례가 권신 임연 일파를 제거하면서 가문이 크게 일어나, 송송례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송송례의 아들과 손자 대에서 5개 파로 갈라지는데, 송휘(宋煇)계가 원윤공파, 송방영계가 밀직공파, 송원미계가 소윤공파, 송린계가 지신공파, 송서계가 정가공파가 되었다.
송송례의 아들 송염은 군부판서에 올랐고, 그 아들 송방영은 밀직부사를 거쳤으며 충렬왕을 보필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송염계보다는 동생인 송분계가 더욱 세력을 떨쳤다.
지신공파에서는 송현수(宋玹壽)를 비롯하여 송세림(宋世琳), 송세형(宋世珩) 형제, 송상현(宋象賢), 송상인(宋象仁) 형제, 송성명(宋成明), 송진명(宋眞明) 형제, 그밖에 송인명(宋寅明), 송문재(宋文載) 등의 명신들이 나왔다.
송현수는 단종의 국구(國舅·단종비 정순왕후의 아버지)로서 단종복위운동 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친구 사이로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양대군을 두둔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월에 유배되어있는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고, 묘소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딸이자 단종비인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등되어 흥인지문 밖의 동망봉(현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서 초가집을 짓고 시녀와 살다 청룡사 스님으로 입산하여 82세까지 홀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었을 당시 멸문지화로 시신을 거둘 친척조차 없어 올케인 경혜공주 시댁(해주정씨)에서 시신을 거두고 장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녀가 살았던 동망봉(단종이 유배된 동쪽을 바라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지금의 숭인공원)과 단종과 이별을 했다는 청계천 영도교(영이별다리)가 있다.
정순왕후 송씨의 묘인 사릉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폐위되자 부인으로 강등되어 청룡사에서 여승으로 있다 82세의 나이로 숨졌다. 친정아버지 송현수 등 친정집안이 모두 멸문지화를 당해 경혜공주(단종의 누이)의 시댁인 해주정씨에서 거둬 장사를 지냈다. |
송상현은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재직 중 중과부적의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그의 아우 송상인은 광해군 때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암행어사, 부사, 관찰사 등을 지냈다.
송시철(宋時喆)은 원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손자 송징은(宋徵慇)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약헌집(約軒集)’을 남겼다. 그의 3형제가 모두 뛰어났는데, 송성명은 예조와 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송진명은 호조와 이조, 예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송인명은 좌의정에 올라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으며, 송성명의 아들 송익보(宋翼輔)는 만언소를 올려 명성을 떨쳤고, 그의 양아들 송문재는 관찰사,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또 송창명의 손자 송면재(宋冕載)는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헌종 때 기로소에 들어갔다.
송상현을 모신 충렬사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로 재직하다 순절한 송상현을 모신 청주의 충렬사. 그곳에 송현수 단소를 비롯하여 여산송씨의 선산과 묘가 있다. |
원윤공파에서는 송익필(宋翼弼)이 대표적 인물이다. 선조 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庶出)이라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의 학문은 사계 김장생 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예학)의 종주(宗主)를 이루었다. 송간의 6세손인 송관(宋寬)은 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송대립(宋大立)은 권율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흥양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또 그의 아우 송희립(宋希立)은 노량진 해전에서 전상을 입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송대립의 아들 송심(宋諶)도 병자호란 때 전사했다.
그 밖에 고종 때 예조참의를 역임한 송영대(宋榮大)와 판관을 역임한 송영윤(宋榮潤)이 유명하고, 송수만은 을사조약 후 일제가 산림개발권을 요구하자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여 이를 철회시키고, 항일운동에 헌신하였고, 송양섭(宋良燮)도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양재동 송동마을 송현수 단소 양재동에는 송동(松洞)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래는 여산송씨의 선산과 집성촌이 있던 곳으로 알려진다. |
여산송씨의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 송요찬(5·16후 내각수반), 송방용, 송지영, 송경섭, 송영주(이상 국회의원), 송정호(법무부장관), 송정범(주미공사), 송재구(여수시장), 송호림(전남도지사), 송하진(전주시장), 송종진(검사장), 송동섭(치안감) 등이 있으며, 학계와 법조계에서는 송성용(서예가), 송계일(동양화가), 송준호(원광대교수), 송진섭(전주교육대학장), 송일섭(한국식물자원연구실장), 송학상(변호사), 송주환(검사)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송주인(전북은행장), 송삼석(㈜모나미 사장), 송학엽(오스카여행사 회장), 송송한(한국휀스기업 대표), 송성문(성문출판사 대표), 송기태(동성사 대표)씨 등이 있다. 연예계에서는 송해(가수, 본명 송복희), 송혜교(배우), 송승헌(본명 송승복, 탤런트) 등도 여산송씨로 알려져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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