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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성·세계성 갖춘 한국문명, 이젠 세계에 알릴 때죠”

입력 : 2014-04-01 21:05:11 수정 : 2014-04-01 23: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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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사람] 英 케임브리지大서 출간할 ‘한국과학문명사’ 총괄 신동원 카이스트 교수 조지프 니덤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의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중국에는 과학이 없었다”고 했던 서양의 편견과 통념을 깬 20세기의 역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로서는 유감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 측우기나 인쇄술 등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우리에겐 상식에 가까운 사실조차 잘못 기술한 책을 두고 ‘20세기의 역작’ 운운한 것에 불쾌할지 모르겠다. 지난달 27일 대전 카이스트(KAIST) 연구실에서 만난 이 대학 인문사회과학과 신동원(54) 교수는 이런 오류를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니덤은 한국 과학사에 대해 굉장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한국의 전통 과학이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논문을 써서 이런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글이 없었습니다.”

그의 진단이 이어진다.

“중국, 일본에 관심 있는 서양인들은 중국어, 일본어를 배워 (책을) 읽습니다. 하지만 간단한 인사나 할 줄 알지 한국어는 모르죠.”

언짢아도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신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가 굉장한 콘텐츠와 문화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신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지원하는 ‘한국과학문명사’ 총서 발간의 연구책임자다. 50억원의 예산으로 10년간 국문판 30권, 영문판 7권을 발간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말 좋은 소식이 있었다. 영문판 출판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가 맡기로 한 것이다.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제목으로 나올 영문판은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애초 예정했던 7권에서 10권으로 늘었다. 전통시대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한국의 과학사를 총체적으로 담을 예정이다. 책이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나온다는 데 의미가 크다.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낸 이곳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명성을 가진 곳이다.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의 권위를 빌림으로써 한국과학문명사가 유럽이나 중국의 그것에 못지않은 가치를 가졌음을 국제적으로 알린다는 의미가 있다. 

일단 영문판 발간이 결정되기는 했지만 신 교수를 비롯해 한국과학문명사 발간에 참여한 학자들은 깐깐한 심사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국 학자들이 1차로 완성한 글은 3명의 영문 에디터를 거치며 내용을 보충하고,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는다. 이렇게 정리된 글이 외국 학자들의 판단을 거쳐 케임브리지대 출판부로 가게 된다.

서구에서 한국의 과학사에 대한 관심도가 여전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케임브리지대 출판부가 영문판 출판을 맡기로 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한국의 달라진 위상이 작용했다고 한다.

“일단 한국 대기업의 진출이 늘었죠. 중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에서 문화적인 관심도 많습니다. 세계 질서가 미국에서 중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징후가 있는데 한국의 사례가 유심히 볼 만하다는 거죠.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중국에 먹히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며 발전을 이룩했는지 궁금한 겁니다.”

직접적으로는 지난해 세계를 강타한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을 들었다.

“도대체 저런 존재가 어디서 나왔는지, 어떤 저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한류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는 거죠. 아무런 맥락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 아니거든요.” 
지난달 27일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만난 신동원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의 한국과학문명사 영문판 발간이 한국 과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동시에 과학사 정리 작업이 지금까지의 한계를 성찰하고, 보다 나은 미래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과학사의 정리는 서구인들이 품은 이런 의문들에 대답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앞으로 10년간의 작업은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까다로운 심사 과정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우리 학계에 이런 작업을 맡을 학자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 큰 문제다. 신 교수 이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제안을 받은 학자들 중에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는 게 중요합니다. 인력이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학사의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만한 학자들은 있습니다. 그리고 10년간의 작업기간이 주어진 만큼 처음 6년은 이미 준비된 사람으로 가고, (적임자가 없는 분야는) 지금부터 학자들을 키워서 나머지 4년의 시간에 투입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신진 학자들을 육성해 전문가풀을 넓히는 효과도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세계에 소개할 한국과학문명사의 성과가 무엇인지 물었다. ‘적합화’라는 단어를 사용해 설명했다. 선진 지식을 수용해 압축하고 최고의 수준으로 적합화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측우기나 동의보감 등이 그렇다고 했다. 칠정산(15세기 서울을 기준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정말 굉장한 작업입니다. 중국, 이슬람 등 세계 최고의 천문학을 다 이해한 뒤에 그보다 수준 높은 응용을 한 것이죠. 당시 가장 발달한 역법을 극복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넣은 겁니다. 이런 역법을 가진 곳은 (당시 세계문명을 주도한) 중국, 이슬람 말고는 조선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고도로 발달해 정점을 찍은 거지요.”

신 교수는 이런 특성이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종교, 사상 등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불교의 원효, 유학의 이황과 이이 같은 존재들이 그렇다. 

지난해 11월 한국과학문명사 영문판의 케임브리지대 출간 사실을 전한 기자간담회에서 케임브리지대 니덤연구소 크리스토퍼 컬런 소장,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윤홍기 교수와 함께한 신동원 교수.(왼쪽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독자성을 실현한 것이네요”하고 나름 정리해보았더니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답했다. 독자성과 더불어 세계성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세계인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정리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과학문명사 정리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성취를 알리는 데 있다. 하지만 신 교수는 “여기에 갇힐 생각은 없다”고 했다. 작업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반성과 성찰, 미래의 모색에도 방점을 둔다. 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우격다짐 식으로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뭔가가 결정되면 정부, 학계, 여론이 똘똘 뭉쳐 앞으로 나아갔다. 큰 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전진하면서 해소했다. 의사결정의 신속성, 유연성, 탄력성이 장점이었다. 돌 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선진국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기적에 가까운 성취를 이뤄냈죠. 하지만 이제 한국문명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모델을 유지했을 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길은 아닌가, 이런 방식을 연장할 것인가, 다른 방식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하지만 답이 보이지는 않죠. 그럴 때 제일 먼저 할 게 정리입니다.”

대전=글·사진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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