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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세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진리를 구한다는 이름으로 치러진 폭력과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였던 불신과 적의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2000년 봄, 가톨릭 수장은 솔직한 사과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했다.

그날의 참회는 장엄한 역사의식이었다. 다섯 명의 추기경과 두 명의 대주교는 과거 가톨릭이 저지른 죄목을 일일이 열거했다. 고문형 종교재판, 유대인 박해, 신대륙 원주민 학살 방조…. 하나의 고백이 끝날 때마다 교황은 참회의 뜻으로 예수의 십자가에 입을 맞췄다.

사과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다. 엊그제 영국과 아일랜드가 윈저성에서 화해의 만찬을 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마이클 하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에게 “과거에 미래가 저당잡혀선 안 된다”고 건배사를 건넸다. 예전에 여왕의 사촌을 죽인 무장테러 조직의 수장까지 참석한 행사했다. 만찬장에는 무장세력이 즐겨 불렀던 아일랜드 민요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고 한다. 700년간 지속된 역사의 앙금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두 나라는 살육으로 얼룩진 앙숙이었다. 영국의 아일랜드 합병과 신·구교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피의 일요일’을 벌이자 아일랜드 무장조직은 ‘피의 금요일’ 테러로 되갚았다. 끝없는 살육전을 종식시킨 것은 영국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영국의 착취에 고개를 숙인 뒤 과거 만행의 진상을 파헤쳤다. 아일랜드 무장조직도 테러 행위에 대한 사죄로 화답했다.

이웃 일본의 소식을 접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국제 미인대회 1위 출신인 일본 여성이 최근 미국 라디오방송에서 위안부 만행에 참회의 뜻을 밝혔다가 곤경에 처했다고 한다. “부끄럽고 분노를 느낀다”는 그녀의 고백에 일본 네티즌들은 저주와 악담을 퍼부었다. 이런 역사 퇴행은 일본에게도 불행이다. 그들이 바라는 강대국의 꿈마저 멀어지게 할 뿐이다. 영국이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영위한 비결은 대포의 힘만은 아닐 터이다. 테러 세력까지 포용하는 넓은 가슴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공자는 “군자의 허물은 마치 해가 일식을 일으키는 것과 같아서 누구나 다 보게 마련이다”고 했다. 나라의 과오도 마찬가지다. 해를 신주 받들 듯하는 일본에 묻는다. 일식처럼 분명한 역사의 진실을 과연 덮을 수 있다고 보는가.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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