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잊지않고 연대해 극복해야 우리나라 작가들은 대부분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고 그 글을 묶어 책으로 펴낸다. 월간도 있지만 계간 문예지가 중심이 된다. 올해 여름호는 발간 날짜가 많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작가들의 원고 마감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감에 맞춰 소설을 쓰던 중에 ‘세월호’ 소식을 접했고 그 이후에는 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런 병든 사회에서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에 빠졌고 때로 문학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곳곳에서 행사와 공연이 취소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팟캐스트도 웃음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문학동네 문학 이야기’에서는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가 쓴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그 책에는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기까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또 다른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었다. 소설가 김연수의 번역으로 새로 나오기 이전까지 그 소설의 제목은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번역됐다. 그 소설에는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고 비통해 하는 부모가 등장한다. 여덟 번째 생일에 차에 치여 뇌진탕을 일으킨 아들. 병원에서 며칠 밤을 새운 부모는 제정신이 아니다. 맞춰놓은 생일 케이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아 화가 난 제과점 주인은 밤마다 기분 나쁜 전화를 걸어온다. 소년의 죽음을 암시하는 협박까지 한다. 결국 아이가 세상을 떠난 날. 기진맥진하고 슬픔에 잠긴 채 한밤중에 집에 돌아온 부모는 제과점 주인의 불길한 전화에 화가 나서 그 길로 제과점을 찾아간다. 그제서야 사정을 알게 된 주인은 자기가 만든 빵을 권하며 말한다. “뭔가를 먹는다는 건 좋은 일이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슬프지만 따뜻하다. “그 빵을 삼키는 기분은 마치 현란한 형광등 불빛 속에서 가슴까지 시원한 햇빛 아래로 나온 것 같은 맛이었다. 그들은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창문에 희미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소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절망보다 더욱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이 무기력이라는 것, 아무 일에도 의욕이 없다는 것은 무덤 속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탐욕은 경계해야 하지만 좋은 의미의 욕망은 삶의 연료가 된다는 것 등.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일깨우는 것은 위로의 방식일 것이다. 겉으로 안정돼 보이지만 삶이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이며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배신과 상실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지, 그 나약한 존재끼리의 사사로운 위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은희경 소설가 |
김수영 시인이 1965년에 쓴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소시민을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시이다. 시인은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사람들을 위해 싸우지 못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라며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라고 자탄한다. 그러나 시인은 자탄에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쓴다.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은 알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우리는 50년 전 김수영 시인이 표현한 대로 소심한 소시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은 존재이지만 연대할 수 있으므로 힘을 가진다. 빵을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토록 사사로운 일이 엄청난 위로가 되듯이. 잊지 않는 것, 사사로운 것 같지만 위로의 중요한 한 방식이다.
은희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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