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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갯벌속 古선박 찾기는 수중유물 발굴 ‘백미’

입력 : 2014-06-11 21:03:36 수정 : 2014-06-11 21: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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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현장 21곳 중 1곳만 빼고 서해안 혹은 남해안 서쪽 해역
갯벌이 유물 진공 상태로 포장 벌레 공격 막아 형태 그대로 유지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인근 해역에 지난 3일부터 누리안호가 떠 바다 밑을 살피고 있다. 8월 23일까지 누리안호가 서해안 갯벌 속을 뒤지며 찾는 것은 고(古)선박과 유물의 집중 매장처. 마도 해역을 포함한 태안의 앞바다는 ‘바다의 경주’라 불린다. 지금까지 수중 발굴의 성과가 그만큼 컸다는 말이다. 고선박 3척이 발굴되고 도자기 등 수천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마도 해역 수중발굴은 1976년 전남 신안군에서 수중발굴이 처음 시작된 이래 한국 수중문화재 발굴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준다. ‘서해안에서 고선박 찾기’로 요약할 수 있다. 고선박은 다량의 유물 발굴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수중발굴은 서해안에 집중돼 있다.

◆서해안의 고선박, 수중유물의 절정

지금까지 발굴된 고선박은 1976년 신안선을 시작으로 12척이다. 신안선과 진도선이 중국배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 시대의 배다. 고선박 출현은 대량의 유물 출수(出水)와 동일시된다. 1323년 중국 원나라에서 출항했다 침몰한 신안선에서는 원나라 도자기 등 2만2000여점이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신안선의 도자기를 보관하면서 ‘세계 최대의 원대 도자기 소장처’가 되었으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완도선’에서 3만여점의 도자기가 나왔고, ‘태안선’에서는 2만4000여점, 마도 1∼3호선에서 2000점이 넘는 유물이 수습됐다. 싣고 있던 물건을 그대로 품고 침몰했기 때문에 선박과 함께 많은 유물이 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중발굴 유물은 9만6000여점에 이른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건을 내려놓고 돌아오던 중 침몰한 것으로 추측되는 안좌도선에는 유물이 별로 없었다.

발굴된 고선박 모두가 12∼14세기, 왕조로 따지면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시간을 놓고 보면 조선시대의 선박이 나올 개연성이 더 크지만, 지금껏 한 척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물들 역시 고려시대의 도자기가 많다. 전문가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문환석 수중발굴과장은 “고려가 해상활동에 개방적이었고, 조선이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차이는 있다. 하지만 조선 역시 바다를 통해 곡물과 지역 특산물을 운반했고 임진왜란 당시 침몰한 배도 상당수”라며 “사료의 난파 기록을 근거로 해당 지역을 탐사했으나 조선시대의 선박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도 1호선을 발굴할 당시 현장 모습.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인근에서 고선박 3척이 나왔고, 수천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마도 해역에 다른 고선박이 있을 것으로 보고 탐사를 이어가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발굴된 잔해와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 복원한 신안선의 모습. 1976년 전남 신안군 증도면의 바다에서 진행된 신안선 발굴은 한국 수중유물 발굴사의 시작이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바닷속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 중인 잠수사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갯벌, 수백년 세월을 이겨낸 원동력

전남 신안군·무안군·완도군, 충남 보령군, 전북 군산시, 경기 안산시, 충남 태안군, 인천 옹진군 등 21곳에서 수중발굴이 진행됐다. 이 중 제주도 북제주군 1곳을 제외하면 서해안 혹은 남해안의 서쪽 해역이다. 수중발굴에서 유독 서해안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갯벌의 존재가 중요하다. 갯벌은 바닷속 유물을 진공의 상태로 포장한다. 갯벌의 진공포장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5년 정도면 선박도 완전히 분해시킬 수 있는 벌레의 공격을 차단한다. 선박의 자재들이 물속에서 수백년을 보내고도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남해안, 동해안은 갯벌이 적기 때문에 침몰선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 문 과장은 “형성된 지가 오래된 갯벌은 삽이 부러질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 있어 벌레가 그 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 벌레 공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선박의 자재들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해안을 가장 활발한 해상루트로 만든 사회경제적 배경도 작용했다. 전근대 시기 권력의 중심지역인 개성과 한양이 국토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 것. 서해안은 이곳으로 가는 가까운 바닷길일 수밖에 없다.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 중앙의 권력자에게 바치는 지역 특산물 등이 서해를 통해 올라갔다. 당시 한·중·일 삼국 해상 교류의 중심 무대이기도 했다. 원나라를 출발해 일본으로 가다 침몰한 신안선과 같은 외국 배들이 활발하게 서해안을 출입했다. 수중유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도자기를 생산한 도요지가 또 서쪽 바닷길과 연결되는 전남 강진과 해남, 부안에 있었다.

오가는 배들이 많으니 마도 해역처럼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는 곳이 발달했다. 고려시대에 마도 인근에는 ‘안흥정(安興亭)’이라는 객관(客館)이 위치해 사신 및 국제 무역선까지 몰려들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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