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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대첩(大捷)과 대승(大勝) - ‘명량’이 ‘군도’를 꺾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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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03 20:58:56 수정 : 2014-08-03 21: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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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매대첩서 승전보”?… ‘대첩’ 잘못 활용 ‘대전’으로 바꿔야
여름방학 시즌을 겨냥한 국내 영화 시장에서 규모 큰 역사물 2편이 맞섰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海戰) 전투 장면을 타이틀로 내세운 ‘명량’이 그보다 먼저 개봉한 의적(義賊) 이야기 ‘군도(群盜)-민란(民亂)의 시대’보다 입장권 예매 성적이 좋았다는 기사의 제목이 ‘예매대첩서 승전보 - 명량이 군도를 꺾다’였다. 명량(鳴梁)은 남도 해남과 보배섬 진도 사이의 좁고 거센 물길이다. 세월호 가라앉은 맹골해협과도 멀지 않다. 봄철 갯바위에서 뜰채로 숭어를 떠내는 모습의 뉴스 등으로 익숙해진 그 바다다. 여기서 충무공은 13척 허술한 배로 그 10배가 넘는 왜적의 전함(戰艦)을 깼다. 물길 양쪽에서는 백성들이 발을 구르며 벅찬 응원을 보냈으리라. 놀랍다, 명량대첩이다.


‘대첩’ 단어가 들어간 말을 찾아보자. 한산대첩·행주대첩·진주성대첩은 임진왜란 3대첩이다. 한산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은 이순신 장군 해전의 3대첩이다. 행주대첩은 행주산성 전투의 권율 장군, 진주성대첩은 진주목사 김시민과 의병장 곽재우가 각각 주인공이다. 두 가지의 3대첩에서 한산대첩이 겹쳤다. 5개 대첩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전남 해남과 진도를 잇는 제2진도대교. 이 다리 바로 아래 바다가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명량해협, 즉 울돌목이다. 충무공이 단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 대함대를 격파한 바로 그곳이다.
전라남도 제공
살펴보니 ‘대첩’은 크게[대(大)] 이긴 싸움, 즉 대승(大勝)한 전투(戰鬪)에만 붙는 이름이다. 한자 첩(捷)의 뜻은 이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매대첩서 승전보…’라는 제목은 명백한 모순이다.

‘대첩’은 그렇게 쓰는 말이 아니구나. 대첩을 대전(大戰)으로 바꾸니 딱 들어맞는다. 승전보(勝戰譜)는 싸움에서 이긴 것을 적은 기록이니, ‘명량’이 예매 기록에서 앞서 대첩을 거뒀다는 것이다. 싸움[전(戰)]의 결과 이긴 것이 첩(捷) 또는 승(勝)이다. 진 것은 패(敗)다. 싸움을 하기도 전에 ‘대첩’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승패는 비교적 익숙한 단어다. 그러나 첩(捷)자는 아무래도 낯설다. 상당수가, 일부 언론인들까지도, 捷을 전투 또는 전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오류(誤謬)는 선거 보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7·30 보선대첩’, ‘수도권대첩’, ‘수원대첩’, ‘순천곡성대첩’ 등 투표 전날까지도 수많은 ‘대첩’들이 언론에 의해 만들어져 독자들에게 노출됐다. 선거에서 엇비슷한 후보자끼리 야무지게 붙었다는 뜻으로 쓴 말이겠다.

이런 말을 보는 시민들은 ‘대첩=대전’의 기억을 (잠재) 의식 속에 담아둘 것이다. 대첩(大捷)이란 말이 옳지 않은 뜻으로 여기저기 퍼져 있고, (확대)재생산되는 이유다.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를 활용하다가 생기는 ‘사고’다. ‘순천곡성대전은 이정현의 대첩으로 끝났다’라고 쓰는 것이 옳은 것, 전투(선거)가 끝나야 누구의 대첩(대승)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전혀 모양이 다른 두 글자 첩(捷)과 승(勝)이 ‘이긴다’라는 같은 뜻을 갖게 된 사연을 챙겨보는 것은 문자(한자)의 뜻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다. 이는 한자를 이해하는 첩경 중 하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이 흥행 돌풍을 일으킨 가운데 3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은 시민들이 표를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연합뉴스
捷은 ‘민첩(敏捷)하다’라는 말로 많이 쓰인다. 재빠르고 날쌘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첩의 처음 뜻이 ‘빠르다, 날쌔다’이고 여기에서 ‘이기다’라는 뜻이 번져 나왔다. ‘이루다’라는 뜻도 있다. 빨라야 이루고 이길 수 있는 것이니, 말[언어]이 말을 낳는 파생(派生) 또는 전변(轉變)에 해당한다. 지름길을 말하는 첩경(捷徑)도 이런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글자의 중요한 부속품인 疌(섭 또는 접)자는 원래 베를 짜는 틀을 돌리는 발판을 그린 글자로 본다. 발을 빨리 움직여야 베를 잘 짤 수 있는 것이니 ‘빠르다, 이루다, 이기다’의 뜻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부수자인 왼쪽의 扌[수]는 손 수(手)자를 다른 글자의 부속으로 쓰기 좋도록 모양을 매만져 간결하게 만든 글자다.

승(勝)은 중국 땅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천자(天子·진시황)’가 자신을 이르는 말로 처음 썼다는 짐(朕)과 힘 력(力)자의 합체다. ‘짐’은 헹가래치는 것처럼 위로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진시황은 이 말을 빌려와 자신에게 필요한 뜻으로 돌려 쓴 것[가차(假借)]이다. 力은 농기구인 쟁기나 팔뚝의 근육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충무공이 이번 세월호 사태를 봤다면 어떤 불호령을 내리셨을까? 충무공 탄신일 하루 전인 지난 4월27일 서울 종로구 KT(한국통신) 광화문지사 건물 외벽에 내걸린 충무공의 대형 걸개그림을 한 시민이 카메라에 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천자의 힘’ 또는 ‘헹가래의 힘’이라는 뜻의 글자이니 勝이 이긴다는 말이 된 것은 자연스럽다. ‘∼보다 낫다, 더 좋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경치가 좋다는 경승(景勝), 재주가 덕보다 크다는(그래서 걱정스럽다는) 재승덕 또는 재승덕박(才勝德薄) 등에서 이 글자가 보인다.

‘이긴다’라는 같은 뜻의 단어지만, 그 어원에 따라 첩(捷)과 승(勝)의 쓰임새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한글로 보면 밋밋하던 것이 한자로 읽으면 문득 그림으로 떠오른다. 소리글자 한글이 뜻글자 한자를 보듬으면 한국어가 더 스마트해지는 까닭의 하나일 것이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kangshbada@naver.com

■ 사족(蛇足)

물살이 흡사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휘돌아 흐르는 좁은 목[해협(海峽·strait)]이라고 해서 ‘울돌목’이다. ‘운다’라는 뜻의 한자 명을 넣은 명량(鳴梁)인 것이다. 량 또는 양(梁)은 ‘대들보’라는 뜻으로, 다리를 말하는 교량(橋梁) 등에 쓰이는 단어다. 간혹 지명에서 해협의 이름으로 쓰인다. 경남 통영 뒷덜미의 한 물길 이름은 견내량(見乃梁)이다.

지금도 명량을 그 일대에서 부르는 이름은 원래 이름인 울돌목이다. 언젠가 땅이름 등록(登錄)을 위해 한자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원래 지명의 뜻을 잘 살려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한자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 ‘명량’이 어떤 이미지로 느껴질까?

명량이 울돌목의 훈독(訓讀), 즉 뜻을 읽어 붙인 이름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해의 작은 섬 독도는 소리를 읽은 음독(音讀)으로 붙인 이름이다. 돌로만 이뤄진 잘생긴 그 섬의 원래 이름은 ‘돌섬’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곳을 지나던 선원들은 ‘독섬’이라고도 했을 터이다. 지금도 경상도, 전라도 해안지방의 ‘돌’의 토속어는 ‘독’, ‘독팍’, ‘도팍’, ‘돌팍’ 등이다.

한자 이름이 필요했던 때 이 ‘독’에 홀로 독(獨)자를 붙였을 것이다. ‘獨島’가 된 내역이다. 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돌섬이 ‘외로운 섬’으로 읽히게 된 이유다. 원래 이름은 모른 채 한자 이름만 보고 어떤 이들이 노래도 짓고 글도 쓰고 한 결과다. 쓸쓸하고 애잔한 그 이름 대신 이 섬의 제 이름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독섬, 도팍섬, 돌섬, 바위섬, 뭐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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