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1982년 워싱턴에서 창간한 워싱턴타임스는 소련의 세계 적화전략으로 위험에 처한 미국을 구하고, 소련 공산주의를 해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은 워싱턴타임스 사옥 전경. 세계일보 자료사진 |
문·한 총재의 이 같은 구상에서 창간된 것이 워싱턴타임스다. 문 총재는 1982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종합일간지 워싱턴타임스를 창간했다. 후발 신문이지만, 보수 성향인 공화당 의원들에 대한 워싱턴타임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워싱턴타임스의 전성기는 냉전 붕괴를 전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1981∼1989년)다. 미국이 사상전에 휘말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워싱턴타임스는 ‘보수의 가치’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워싱턴타임스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목에 마지막 비수를 꽂은 신문이 됐다는 게 미국 언론계의 평가다.
1950년대까지 소련은 원자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소련은 미국의 원자탄 설계도를 훔쳐 자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은 알고 있었지만, 자국의 비축량을 따라올 수 없다는 생각에 방관했다. 그런데 30년 후에 이야기가 달라졌다. 소련은 1980년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갯수에서 우위를 보인 것은 물론이고 미국보다 성능이 우수한 수소폭탄도 보유했다. 소련의 군사력이 미국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 총재는 미국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문 총재는 즉각 워싱턴타임스를 통해 “핵전쟁을 하면 미국이 망할 수도 있다”는 폭탄선언을 내보내도록 했다. 미국인들은 물론, 세계가 깜짝 놀랐다. 미국 일각에서 “워싱턴타임스가 정확히 지적했다”며 찬성여론이 일었다. 워싱턴타임스는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을 지지했다. SDI는 미 영공 전체에 핵우산을 씌우는 전략이다. 워싱턴타임스는 SDI을 채택해야만 미국이 산다며 연일 포문을 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이 같은 워싱턴타임스의 보도에 자극을 받아 1983년 3월 23일 SDI를 정식 미 국방정책으로 채택했다. 미국의 SDI 전략에 소련은 당황했다. 소련도 여기엔 속수무책이었다. 문 총재는 워싱턴타임스를 통해 소련 공산주의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퇴임 전인 1989년 박보희 워싱턴타임스 사장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워싱턴타임스의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SDI 전략을 실행할 수 없었다. 문 총재님은 미국을 구하신 분”이라고 칭송했다는 후문이다.
그로부터 1년 뒤, 1990년 4월 11일 문·한 총재는 소련 크레믈궁으로 초대됐다. 문 총재는 이 자리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한다. 이 회담이야말로 인류역사의 큰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문 총재는 고르바초프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공산주의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공산주의는 곧 망한다고 예언했다. 소련은 세계 적화 전략을 포기하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어 “인류가 죽고 사는 일이 당신의 손바닥 안에 있으니, 역사에 남을 평화대통령이 돼 달라”고 호소했다. 불쾌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달리,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감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 총재의 권고를 따랐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세계 적화 전략을 포기하고, 공산당을 해체했다. 이어 연방이 해체됐고, 러시아에 민주화가 시작됐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총 한 방 쏘지 않고 소련 공산주의를 해체한 문 총재야말로 소련의 해방자요, 인류의 영웅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존 살로먼 워싱턴타임스 편집인은 “레이건 대통령도 소련 붕괴에 워싱턴타임스가 기여했다고 말했다”면서 “백악관 직원이 매일 새벽, 신문사로 직접 찾아와 워싱턴타임스를 갖고 가 레이건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당시 워싱턴타임스는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는 신문으로 명성을 날렸다.
◆ 유엔을 무대로 한 평화운동
문 총재와 한 총재는 평화운동을 하는 데 유엔 무대를 자주 활용했다. 한국전쟁 때 유엔이 보여준 은혜에 대한 감사였고, 세계 평화에 대한 책임을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문 총재는 2000년 8월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에서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연차 총회를 열고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비무장지대(DMZ)를 평화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문 총재는 이날 ‘세계와 유엔이 나아갈 길’이란 주제 강연에서 “본인은 그동안 남미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4개국) 지역에 약 120만ha에 달하는 비옥한 토지를 구입해 보유하고 있다. 이 땅으로 평화공원으로 조성된 국토 상실분은 보전해주고, 남북한 지도자들에게 일부 기부하겠다고 통고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대중 정부도 이에 화답하듯 일주일 후인 2000년 8월 24일 경의선 철도와 군사분계선이 만나는 지점에 북한 측과 협의해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평화공원의 구역과 기능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평화시(市)’로의 발전을 유도하고 동시에 DMZ를 평화벨트로 지정해 이 지역 전체를 평화와 생명의 상징인 평화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 뒤 박근혜 대통령도 2013년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과 DMZ 내 세계평화공원 조성을 북한에 제의한 바 있다.
한편, 문·한 총재는 현재의 유엔으로는 국가 간 갈등과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보고, 1999년 2월 6일 유엔을 대체할 기구로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을 창설했다.
문 총재가 주창해온 것은 국경 철폐다. ‘국경은 사탄이 만든 장벽’이라고 강조한 문 총재는 세계평화도서국가연합(FINWP), 세계평화대륙국가연합(FCNWP), 세계평화반도국가연합(FPNWP),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 세계평화몽골반점동족연합(MPFWP) 등 국가 간 연대 기구를 잇따라 창설하며 민족·인종·종교 간 화합 운동에 힘을 쏟았다.
북남미 카우사 운동을 이끈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선명 총재(왼쪽)가 1991년 4월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 우루과이 대통령을 만나 포옹하고 있다. 카우사 운동은 남미 지역 국가의 평화와 화해에 크게 기여했으며, 최근에는 천주평화연합(UPF)의 ‘평화대사 운동’으로 계승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문·한 총재의 이 같은 헌신의 결과로 천주평화연합(UPF)과 남북미통일연합(CAUSA·카우사 인터내셔널) 등 주요 기구들과 남미 중심 종교인 가톨릭과의 관계도 크게 개선됐다. 로마 교황청은 2014년 1월 시리아 내전의 해결을 위해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 각계 지도층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세미나를 했다. 여기에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추천으로 교황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UPF 책임자 미겔과 토머스 월시 세계회장이 주요 연설자로 초청됐다. 이들은 교황 공관에서 함께 숙식하며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문 총재는 1980년 10월 남북미 화합과 세계 평화 구현을 위해 전직 국가수반을 중심으로 카우사를 창설했다. 카우사는 남미 전역을 순회하며 세미나를 열었다. 이로 인해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에콰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브라질 등 가는 곳마다 크게 환영받았다. 가톨릭 국가들인 남미에서 카우사가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자 교황청에서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카우사 운동의 주역이었던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명예총재는 “문 총재님은 세계를 적화하려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멸망시킨 영웅이요, 21세기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신 분”이라며 “한마디로 문 총재님은 세계를 구원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어른이 평화의 왕이 아니고 누가 평화의 왕이 될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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