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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선반기계 1대로 일군 방산업체… 자주국방 기틀 마련

입력 : 2014-08-10 21:37:21 수정 : 2014-08-10 21: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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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 성화 2주년 특별기획-기술입국 초석을 놓다]
(상) 통일중공업 신화를 만들다
경남 창원공단의 통일중공업(이하 통일)은 업계의 전설로 통한다. 한국 굴지의 방위산업체 통일은 1960∼80년대 정밀기계공업의 선도자요 요람으로 잘알려져 있다. 통일이 태동할 무렵 국내 정밀기계 분야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훈련받고 숙련된 2만여 엔지니어가 업계 곳곳으로 진출해 현재의 한국 기계공업 초석을 다져왔다.

통일을 설립한 이는 다름아닌 문선명 총재다. 종교지도자인 문 총재가 무슨 까닭으로 기계공업을 일으켰을까.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강한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갖고 살았다. 살상무기를 팔아 사업하자는 것이 문 총재의 목적이 아니었다. 문 총재는 조속히 세계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평화사상의 전달자이자 신념의 지도자였다.

통일산업 창원공장을 방문해 공작기계 생산라인을 살피고 있는 문 총재(1983년 1월).
특히 당시엔 북한의 남침 위협이 상존했다. 그런 한국의 실정에서 하루빨리 방위산업을 육성해 튼튼한 국방을 다져야 한다고 문 총재는 강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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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토대를 이룩하다

통일중공업은 ‘예화산탄공기총 제작소’가 시초다. 1959년 12월 정부의 최초 인가를 받았다. 시장조차 형성되지 않아 향후 사업 전망이 불투명했던 시절이었다.

화폐개혁 전인 1962년 당시 문 총재는 일본 사람들이 쓰다가 버리고 간 선반기계를 72만원에 샀다. 이어 통일교회본부로 사용 중인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적산가옥 연탄광에 들여놓고 ‘통일산업’이라는 간판을 처음으로 달았다. 보잘것없는 이 선반기계 한 대가 이후 통일의 모체가 되었다.

해외에서 온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문 총재는 10년 이상 걸리는 개발 기간을 3년으로 단축하는 성과를 이뤘다. 공작기계 제작에 성공한 이후 공기총과 선반, 부속기계 등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60년대 중반에는 경기 구리시의 일화제약 자리로 옮겼다. 이어 그 유명한 M1 소총과 똑같은 모양의 공기총을 만들어 당시 청와대에 납품했고 1969년에는 당당히 납품 계약을 할 수 있었다.

1973년 경남 창원시 외동에 공장 부지를 매입하고 본격적인 생산시설을 갖추면서 방위산업체로 나서기 시작했다. 분당 30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대공방어용 벌컨포를 국내 처음 개발했다. 125㎜ 중기관총, 항공용 20㎜ 기관포, 30㎜ 대공포, 40㎜ 함포와 군 장갑차 및 자주포용 변속기를 연달아 개발해 군에 공급했다. 한국은 자주국방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문 총재는 엔지니어 기술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978년 9월 세계 과학기술 최강국인 독일의 뒤셀도르프에 ‘유럽경제기술정보센터’를 설립했다. 엔지니어를 유학·파견해 교육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독일 유수 공작기계와 자동차 부품 생산 업체 등 4개 회사도 사들였다. 엔지니어 교육이 주 목적이었다.

1978년 6월 통일은 공작기계 종합전문 생산업체로 지정되었다. 1979년 기계정밀도 1급업체로 지정됐고, 1984년 1월엔 공장 옆 동양기계를 인수해 (주)통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본격적인 초정밀 공작기계 양산체제로 진입했다.

1982년에는 사람이 없는 무인공장 가동이 가능한 고성능 산업로봇을 국내 처음 개발해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이 로봇은 일본에서도 개발을 포기하다시피 한 것으로 당시 국내외 업계의 화제가 되었다.

1991년 (주)세일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한 데 이어 1995년 중형항공기 개발사업 참여와 함께 통일중공업(주)으로 다시 상호를 변경하면서 차량, 정밀 공작기계 전부문 ISO9001 인증을 받았다.

창원시 외동의 초창기 통일산업 창원공장 전경(1981년).
◆통일은 엔지니어 양성소


이때쯤 통일중공업의 수준이 완성차 생산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정부가 완성차 생산의 허가를 내주지 않자 문 총재는 통일의 기술자를 1년에 3분의 1씩 교체하도록 지시해 핵심 엔지니어들이 동종 업계 전 분야로 진출하게 했다. 이로 인해 ‘통일은 인재 양성소’라는 별칭을 듣기도 했다. 업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 총재 유일의 경영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먼 미래 한국 기계공업의 동반 발전을 내다 본 포석이었다.

기술자가 유출되면 모기업은 망한다는 통례를 깨고 타 완성차 업계로 기술을 이전하는 효과를 낳았다. 즉 ‘내가 안 되면 남이라도 되게 하겠다는 기술분할 운동’을 전국 최초로 펼친 인물이다.

통일중공업은 1994년 무렵 중국 항공산업 총괄기관인 ‘항공공업총공사’ 산하 ‘남창비행제조공사’와 ‘항공기 생산 및 운항에 관한 협력계약’을 체결하고 민간항공기 제작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당시 통일중공업의 주 생산품목은 공작기계와 무인자동차 공장의 유연생산 시스템, 트랜스미션 등 자동차 변속기와 차축 외 무기용인 군수용 방산제품이었다. 특히 통일이 만든 버스와 화물트럭용 트랜스미션은 우리나라 완성차 업체들도 납품받지 못하면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관련 업계의 의존 비중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같은 회사의 성장은 강성 노조가 생겨나면서 시련을 겪게된다.

1984년 인수한 동양기계공업의 노조원들은 새로 출범한 통일중공업을 터전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이들은 창원지역 노조연합을 결성해 한국 기계공업과 방위산업 메카인 마산과 창원 지역을 노동운동 본산지로 활동하게 되면서 공장의 제반 경영에 타격을 초래했다.

1987년을 전후로 공장이 있는 창원대로에는 화염병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폭력을 동반한 노조원들의 격한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공장은 가동을 중단해야 했으며 납품을 받지 못한 자동차 관련 업계들도 조업에 차질을 빚는 등 파문은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쳐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이어 각종 핵심부품 부족으로 연쇄 피해를 본 기계와 자동차 관련 업계들은 자구책으로 부품 수입과 자체 생산라인 설치 등으로 회사 경영은 더욱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생산라인은 멈출 수 없었다. 적자를 감수하면서 조업을 지탱해 왔으나 결국 1998년 불어닥친 IMF 위기로 다시 직격탄을 맞아 그해 11월 말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문 총재는 당시 27%에 불과한 통일 지분에도 불구하고 부도 직전까지도 500억원이 넘는 신규 자금을 투입하고 상당한 양의 통일 소유 부동산을 남겨두는 등 책임을 다했다.

유사 상황 시 책임 회피와 자금 빼돌리기, 잠적에 나서는 타 업체 대표와 책임자들의 모습과는 큰 대조를 보였다. 따라서 통일은 오히려 정도경영으로 조사조차 받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이 되기도 했다.

통일중공업의 부도를 시작으로 대부분 계열사도 부도 처리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통일중공업과 주력 계열사인 한국티타늄 등이 다른 기업에 넘어가고 일화와 일신석재, 일성건설은 법정관리 끝에 회생됐다.

당시 통일은 핵심기업을 되찾기 위해 5000억원의 막대한 자금을 추가 지출하는 등 직접 손실액만도 1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문 총재는 부실회사 매각과 구조조정 등의 노력 등 회생 노력으로 2005년 전문지식과 기업경영 실력을 갖춘 직계에 경영 전반을 넘기게 되었다. 이어 그룹 흑자 전환과 안정적인 운영체제를 다지게 됐다는 것이 창원공단 업계들의 평가다.

당시 통일중공업에서 1990년까지 공작기계 전자제어장치 생산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회사 전환기를 지켜보아야 했던 주장용(62· 안양시 WE ONE 대표)씨의 증언이다. “문 총재가 통일산업을 만든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죠. 이는 회사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기계기술 발전이 전 세계의 기술 글로벌화로 이어지도록 ‘기술 평준화’를 이루는 것이 그의 꿈 이었습니다.”

그는 또 “ 문총재는 육신은 떠났지만 대한민국 산업 발전을 통해 세계의 모든 국가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는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후세들도 서로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통일중공업이 지금은 새 주인을 맞아 S&T중공업이라는 이름으로 자동차 엔진용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당시(1987년) 통일의 주요 협력업체로 출범한 예화공업(주)이 지금은 TIC(주)(대표 정봉채)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통일의 기술 명맥을 잇고 있다.

창원=안원준 기자am33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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