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제인권법 권위자인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변호사는 1992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라고 처음 위안부 문제를 유엔에 제기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20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가 되지 않으면 될 수가 없고, 의사에도 반하는 것”이라면서 “성노예가 분명하다”고 재차 확인했다. 또한 위안부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범죄행위로 규탄받은 것으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유엔에 처음 제기하게 됐나.
“처음부터 위안부 문제를 위해 유엔에서 활동한 건 아니었다. 정신장애자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재판에서 패할 경우 유엔 규약인권위원회에 통보할 수 있는 ‘개인통보권’ 제도를 도입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개인통보권이 도입되지 않으면 피해자를 대리한 변호사가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밖에 없어 오히려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했지만, 정부는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매년 유엔으로 가 일본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재일 조선인과 한국 여성들이 도와달라고 해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게 됐다.”
“1992년 유엔에 호소하기 2년 전, 사회당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참의원의 의뢰로 위안부 문제를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변호인으로 그 문제를 풀어가는 것엔 동의할 수 없었다. 우선 피해자가 없어 사건으로 검토할 수 없었다. 또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될 수밖에 없는데, 당시 일본 국내법으로는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1년 8월14일 김학순씨가 위안부였음을 증언했고, 1992년 1월 주오(中央)대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가 방위청 자료관에서 일본군이 관여한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발굴해 공개했다. 변호인으로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의무였다. 마침 그해 유엔 인권위가 예정돼 있어 위안부문제를 다루기로 결정했다.”
1992년 2월, 그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국제법상 인신매매(트레이드) 위반이라며 ‘위안부는 성노예’라고 주장했다. 그의 문제 제기를 시작으로 유엔에서 위안부 논의가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왜 위안부가 성노예인가.
“일본군 관여 자료와 피해자 증언집을 보며 판단했다. 유엔에선 국제법 위반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발언이나 호소가 되지 않는다. 국제 인권조약이 없던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국제법에서 가장 중요시한 인신매매 금지를 적용했다. 또 ‘내가 여성이라면, 일본이 전쟁에서 이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위안부를) 절대 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강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의사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노예라고 생각할 것이고, 성 문제여서 ‘성노예(sex slavery)’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의사로 병사를 위안한다’는 위안부라는 말은 웃기는 것이다.”
“확립돼 있다. 인신매매 금지가 국제법에서 규정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건 일본밖에 없다. 일본 정부가 지난 7월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문제다. 성노예가 아니라는 건 ‘위안부=매춘부’라는 얘기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다시 모욕하는 것으로, 새로운 가해이다. 피해자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일본은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입장 아닌가.
“위안부 보상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언젠가 김영식 전 외무장관은 당시 교섭 과정에서 불법행위 문제 논의가 없었다면서 ‘만약 불법 행위가 발견되면 나중에 교섭한다’는 일본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가 말한 의사록을 공개했다. 일본은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실제 교섭에서는 경제협력이나 돈 문제만 얘기했다. 아울러 돈 문제는 해결했지만 범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전 일본 재판소도 인정한 범죄 문제이다. 1965년 교섭 과정에서 범죄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 외에도 많은 인권문제를 호소해왔는데.
“변호사 개업 이후 본격적으로 맡은 사건은 스몬병(SMON) 사건이다. 스몬병은 설사약을 먹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증상이다. 피해자가 일본에만 1만명 정도 있었다. 변호사 40여명과 함께 싸웠다. 소송에서 이겨 많은 수입이 들어왔지만, 사무국장처럼 돼 그후 큰 수입은 없었다. 1982년에는 정신병(그는 정신장애가 아닌 정신병이라고 했다) 인권문제를 다루게 됐는데, 미디어 등이 주목하지 않아 유엔에 호소하게 됐다.”
-국제인권법은 어떻게 연구했나.
“대형 사건에 계속 연루되면서 변호사 사무실이 파탄났고 몸과 마음도 지쳤다. 정신과 의사들도 쉬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1989년 영국으로 공부하러 갔다. 당초 정신보호법을 연구하려 했지만 중간에 국제인권법으로 바꿨다. 런던대학대학원에서 여성으로 처음으로 국제재판소 재판관이 된 로절린 히긴스에게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 1998년부터 2년간 미국 워싱턴대에서도 공부했다.”
-정력적인 인권 옹호 활동의 원천은 무엇인가.
“울병(우울증의 일종)이다. 초등학생 시절 ‘인간은 왜 사는가’를 알지 못해 자주 생각했지만,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해 점점 침울해졌다. 심리학 대학원으로 진학했다가 아버지 조언으로 법학부로 옮겼다. 변호사가 되니 인권침해 피해자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이렇게 힘든 사람도 있는가’라는 생각에 울병을 잊고, 밤낮으로 일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
-지금은 어떤가.
“인간은 반드시 죽지 않는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히긴스에게 ‘위안부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싱글벙글 웃더라. ‘재미있는 문제와 부딪쳤다’며 ‘도서관에 가라’고 말해주더라. 도서관에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새로운 발견이 이어졌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위안부 문제, 한국병합 조약, 안중근 문제와 부딪친 것은 모두 해피(happy)였다.”
4시간30분간의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해피’해 보였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야 그날 사이타마 기온이 37도라는 걸 우린 알았다. 이미 팔과 얼굴 등이 벌겋게 달아오른 뒤 화끈거렸다.
사이타마=김용출 특파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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