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가까이 경제관료로 한길을 걷다 지난 3월 한국경제연구원 수장으로 취임한 권태신(65·사진) 원장. 16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집무실에 만난 그는 기업 투자를 이끌어 내는 경제 활성화 해법으로 ‘성역 규제’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권 원장은 “성역 규제는 다른 이름으로 ‘핵심 규제’, ‘덩어리 규제’라 할 수 있는데, 여건이 달라졌어도 예전 규제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라며 “수도권 공장총량제, 중소기업 적합업종 등 대기업 규제, 경제민주화로 남발된 각종 규제, 노동시장 규제 등이 꼽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과도한 소음 규제가 문제였다. 환경부가 일본의 소음방지법을 그대로 들여왔는데 녹지 소음은 야간 40dB(데시벨)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권 원장은 “귀뚜라미가 울어도 그 정도 수치는 넘는 게 현실인데 소음 기준을 어찌 지키겠느냐” 반문했다.
그는 해결에 나섰지만 광명시는 시민 피해를 두고 볼 수 없다고 손사래쳤고, 공장을 인적이 드문 인근으로 옮기도록 해 달라고 요청받은 국토부는 수도권정비법에 따른 공장총량제로 묶여있어 안 된다고 도리질했다.
환경부 역시 규제를 풀 수 없다는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권 원장은 “환경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세 차례 경고에도 소음을 줄이지 못한 소하리공장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폐쇄명령도, 해결책도 못 내린 채 흐지부지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유사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며 “이 같은 근본적인 규제가 해결돼야 비로소 기업 투자가 살아나고, 일자리도 늘어 소비와 경제가 활성화한다”고 강조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제수장으로는 이례적으로 최근 “디플레이션 초기에 와 있다”고 거론해 논란이 분분하다. 경제주체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 부총리의 지적이 맞다고 본다. 경제위기에 처한 만큼 최 부총리의 발언으로 정신을 차릴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본다. 외환위기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과장으로 일했던 때다. 당시 외국에서는 전부 한국이 무너진다고 봤다. 경제관료 실무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도 당시 경제정책 당국자들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고 ‘위기’라는 얘기는 못 꺼내게 했다. 외환위기 터지기 2개월 전까지도 “경제 펀더멘털은 좋다”고 떠들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상황도 외국에서는 우려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돌아보면 일본식 장기침체로 가는 것이 확실하다. 외환위기 때 당해보고도 당국자들이 쉬쉬해서는 안 된다.”
“장기적·구조적으로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과거 우리는 늘 세계경제 성장률보다 두세 배 빨리 달렸는데, 지난 10년 동안 앞선 해는 두 번에 그쳤다. 잠재성장률이 얼마 안 가 3%대로 떨어지고, 10년 내 2%대로 떨어진다는데, 위기가 아니겠느냐. 실물경제를 봐도 그렇다. 먼저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있다. 가계부채는 1000조원을 훨씬 넘는다. 청년실업률도 높다. 저출산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고령화도 미국, 영국, 일본 등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 게다가 마땅한 미래 성장동력이 없다. 복지지출은 계속 늘어 국가재정의 부채를 늘리고 있다. 이게 일본식 장기침체에 들어가는 조짐이다.”
―기업이 투자에 적극 나서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업이 투자할 수 없도록 옭아매는 제도가 너무 많다. 대기업 규제가 대표적이다. 특정 업종에서 진입할 수 없도록 하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있고, 상호출자 제한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자회사를 많이 못 만들게 한다. 새로운 분야인 융복합 산업이 자꾸 나오는데, 이래서는 그런 분야에 투자를 할 수 없다. 기업이 투자를 많이 늘리고, 외국인 투자가 활성화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소비가 진작된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외국으로 빠져나간 돈이 3000억달러인데 들어온 돈은 1000억달러밖에 안 된다. 그만큼 일자리가 해외로 나간 것이다. 우리가 작년에 유치한 외국인 투자가 110억달러인데 우리보다 덩치가 작은 홍콩이 500억달러이고, 싱가포르는 700억달러에 달한다.”
“그렇다. 근본적으로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면 반기업 정서도 없어져야 되고, 규제도 개혁돼야 한다. 규제 개혁 중에서도 허구한 날 말만 하다 못하는 게 있다. 대기업 규제, 수도권 규제다. 20년 전부터 수도권에 공장총량제를 적용해 증가를 제한하니까 기업들이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가는 게 아니냐. 규제를 완화해야 외국 기업도 들어와 공장을 짓는다. 이에 따라 일자리가 늘고, 가계부채와 부동산 침체, 청년실업도 해결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개혁회의를 수차례 주재했지만, 이제 ‘액션’이 나오고 실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때다.”
―대통령이 규제개혁을 부르짖어도 공직자는 바뀌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공무원으로서는 규제가 있어야 아쉬운 이들이 찾아오고, 전화로 부탁도 하고 식사도 하자고 하니 버리기 싫을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규제 권한으로 실속을 챙겨보자는 심보다. 규제를 풀면 감사원에서 특혜 뒷조사를 벌여 감사 때마다 지적하는 현실도 공직자의 복지부동을 부른다. ‘안 된다’고 하면 책임질 일도 없는데 누가 풀어주려 나서겠느냐. 규제를 통해 이득을 보는 소수 이해관계자의 반발도 공무원에게는 부담이다. 말썽이 생기면 책임져야 해서다. 무슨 사건만 생기면 규제로 덤터기를 씌우는 국회도 문제다. 그런 이유로 50년 전 규제가 이유 없이 살아있는 것들이 많다. 완화한다는 총론에는 다 찬성인데, 각론에 가면 반대가 튀어나와 해결이 안 된다.”
―최경환 경제팀이 추진 중인 사내 유보금 과세로 앞으로 기업 부담이 커진다.
“최 부총리가 너무 짧은 시간에 인위적으로 해결하려고 드니까 문제가 생긴다. 사내 유보금 중 현금성 자산이 많으니까 배당을 하던지, 임금을 높이던지, 투자하던지 하라는 것인데, 취지는 좋다. 하지만, 기업은 속성상 장사가 되고 돈을 벌면 투자하는 조직이다. 반대로 잘못 투자하면 쫄딱 망하기도 한다. 인위적으로 투자하라고 야단쳐도 회사 망칠 짓을 왜 하겠느냐. 세금으로 지원하고 규제를 풀어주는 것이 투자 유인의 기본이다. 기업 입장에서 투자를 안 하면 세금을 매긴다 하면 차라리 맞는 게 낫다. 임금을 올려주기도 어렵다. 생산성보다 임금이 더 높은 게 우리나라 문제다. 노동조합에 가입된 대기업과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 영세상인, 비정규직과의 임금격차만 더 벌어질 뿐이다. 배당을 키우면 외국인 주주는 이를 갖고 해외로 나가 버리고, 기관투자가 등을 통해 돈 없는 서민의 소비여력을 키우는 효과도 크지 않다.”
“한국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전세계와 비교하면 1%도 안 된다. 그런데도 혼자 너무 앞서 나간다. 유럽에서도 독일만 빼고 아무도 안 한다. 중국과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작년 집권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국제사회에 약속한 탄소세를 폐지한 것이다. 탄소세를 받으니까 물가가 오르고 전력요금도 비싸져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만큼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는 기업 수도 많지 않으니 배출권 거래 시장이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녹색성장은 다른 나라가 하는 수준만큼만 나가면 된다.”
대담=최현태 산업부장, 정리=황계식, 사진=이재문 기자 cult@segye.com
권태신 원장은… ▲1949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대학원) ▲미국 밴더빌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영국 런던 CASS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대통령비서실 산업통신비서관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대통령비서실 경제정책비서관 ▲재정경제부 2차관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 ▲국무총리실장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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